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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완)

by 김창집1 2025. 11. 5.

 

 

누에고치의 변 - 강준모

 

 

옷 한 벌 내 스스로 짓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평생 먹은 거 고스란히 토해 내

수의 만들 듯 엄숙하게

흰옷 한 벌 짓는다는 게

어디 쓸쓸하기만 한가

옷은 마음보다 큰 외투라네

노잣돈 담을 주머니도 없고

이 목숨 하나 밖에 못 들어가지

햇빛에 자란 뽕잎 먹고

사각사각 푸른 시간 갉아먹어

무거운 날개로 부활하는

지상의 사명을 가지려 하네

밤의 슬픈 고요와 침묵일랑

빛의 이야기로 또박또박 기워서

평생 무덤 같은 옷 한번 짓고 싶네

그 옷을 입고

날개로 부활할 것이나

나는 아직 한 마리 중생

옷을 짜는 중이라네

 

 



분홍빛 목소리 장성호

 

 

향원정에서 저 홀로 분홍빛 옷자락을 여미고

있답니다

 

오전에 일찍 오시면 제 속을 모두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삼일 지나면 제 치맛자락을 다시는

보실 수 없을 겁니다

 

저는 화려하고 당당하게 춤을 추고 생을

마감하기에 여한이 없습니다

 

제가 남긴 연밥이 저를 대신해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겁니다

 

그대여 제 영정사진 잘 찍어 주세요

 

 



개벽開闢 - 정형무

 

 

찬바람이 암컷 소리를 흉내 내는 한낮

 

목백합 높은 가지에 까마귀 날아들어

부푼 반달을 쫀다

 

물먹은 불두화 꽃잎들이

머리 숙여 순백의 나발螺髮을 부려 놓을 때

 

칡넝쿨 환삼덩굴은 개망초 여린 줄기를 다투고

어린 염소는 센 수염 염소와 뿔을 겨룬다

 

쪼쪼쪼, 지저귀는 새소리

퐁당, 머구리 뛰어드는 소리

 

묵무덤 수북한 삐비꽃 너머

 

시시각각 천지개벽이다

 

 



라자루스* - 정형무

 

 

사랑을 하다 멈춘 기계

눈알을 360도 돌려 본다

 

더 이상

그것이 되어 버린 그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로봇 춤을 추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었지만

개뿔, 그들까지도 잊기로 한다

 

큰 이빨 한 개가 맥없이 떨어진다

배지 잃은 남자들의 쭈그리진 눈알이 바닥에 나뒹군다

 

멈춘 사랑을 웨지로 퍼 올려 홀에 빠뜨릴까

만날 수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나는 매일 노을과 이별하고 아침이면 태양과 함께 깨어난다

 

밤마다 찾은 섬망 끝에 열리는 노란 번개

그 사이에

그것은 험악한 아가리를 벌려

그를 그녀를 잡아먹는다

 

아무래도

나는 미쳤거나 죽은

것이고

죽었지만 가끔 목젖을 움직이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때아닌 가을마냥

매번 일주일 후에 죽는 미련마냥

 

하지만 난 나사로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 때문에

그녀 때문에

입술 입 이빨 허기진 혀

빨기도 전에 사라지는 시간 때문에

뱉기 전에 끝나는 욕 때문에

나는 몸부림친다

 

손끝을 빠져나온 나뭇가지가

가야 할 홀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머리칼에 매달린 딱정벌레가 조금씩 꿈틀낸다

 

으으 저토록 썩은 입 파리

통증에 까무러치는 이빨

겨우 눈을 뜨자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담배 냄새가

시퍼렇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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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루스 증후군(Lazarus syndrome) 또는 심폐 소생술 실패 후 자동소생은 소생 시도 실패 후 순환의 자발적인 재생이다. 1982년부터 의학 문헌에 최소 38번 이상 주목받아 왔다. 이 증후군은 기독교의 신약성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에 의해 소생한 라자로(Lazarus)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위키백과에서 빌림.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월간 우리202510월호(통권 44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