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에고치의 변 - 강준모
옷 한 벌 내 스스로 짓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평생 먹은 거 고스란히 토해 내
수의 만들 듯 엄숙하게
흰옷 한 벌 짓는다는 게
어디 쓸쓸하기만 한가
옷은 마음보다 큰 외투라네
노잣돈 담을 주머니도 없고
이 목숨 하나 밖에 못 들어가지
햇빛에 자란 뽕잎 먹고
사각사각 푸른 시간 갉아먹어
무거운 날개로 부활하는
지상의 사명을 가지려 하네
밤의 슬픈 고요와 침묵일랑
빛의 이야기로 또박또박 기워서
평생 무덤 같은 옷 한번 짓고 싶네
그 옷을 입고
날개로 부활할 것이나
나는 아직 한 마리 중생
옷을 짜는 중이라네

♧ 분홍빛 목소리 – 장성호
향원정에서 저 홀로 분홍빛 옷자락을 여미고
있답니다
오전에 일찍 오시면 제 속을 모두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삼일 지나면 제 치맛자락을 다시는
보실 수 없을 겁니다
저는 화려하고 당당하게 춤을 추고 생을
마감하기에 여한이 없습니다
제가 남긴 연밥이 저를 대신해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겁니다
그대여 제 영정사진 잘 찍어 주세요

♧ 개벽開闢 - 정형무
찬바람이 암컷 소리를 흉내 내는 한낮
목백합 높은 가지에 까마귀 날아들어
부푼 반달을 쫀다
물먹은 불두화 꽃잎들이
머리 숙여 순백의 나발螺髮을 부려 놓을 때
칡넝쿨 환삼덩굴은 개망초 여린 줄기를 다투고
어린 염소는 센 수염 염소와 뿔을 겨룬다
쪼쪼쪼, 지저귀는 새소리
퐁당, 머구리 뛰어드는 소리
묵무덤 수북한 삐비꽃 너머
시시각각 천지개벽이다

♧ 라자루스* - 정형무
사랑을 하다 멈춘 기계
눈알을 360도 돌려 본다
더 이상
그것이 되어 버린 그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로봇 춤을 추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었지만
개뿔, 그들까지도 잊기로 한다
큰 이빨 한 개가 맥없이 떨어진다
배지 잃은 남자들의 쭈그리진 눈알이 바닥에 나뒹군다
멈춘 사랑을 웨지로 퍼 올려 홀에 빠뜨릴까
만날 수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나는 매일 노을과 이별하고 아침이면 태양과 함께 깨어난다
밤마다 찾은 섬망 끝에 열리는 노란 번개
그 사이에
그것은 험악한 아가리를 벌려
그를 그녀를 잡아먹는다
아무래도
나는 미쳤거나 죽은
것이고
죽었지만 가끔 목젖을 움직이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때아닌 가을마냥
매번 일주일 후에 죽는 미련마냥
하지만 난 나사로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 때문에
그녀 때문에
입술 입 이빨 허기진 혀
빨기도 전에 사라지는 시간 때문에
뱉기 전에 끝나는 욕 때문에
나는 몸부림친다
손끝을 빠져나온 나뭇가지가
가야 할 홀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머리칼에 매달린 딱정벌레가 조금씩 꿈틀낸다
으으 저토록 썩은 입 파리
통증에 까무러치는 이빨
겨우 눈을 뜨자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담배 냄새가
시퍼렇게 들려왔다
---
*라자루스 증후군(Lazarus syndrome) 또는 심폐 소생술 실패 후 자동소생은 소생 시도 실패 후 순환의 자발적인 재생이다. 1982년부터 의학 문헌에 최소 38번 이상 주목받아 왔다. 이 증후군은 기독교의 신약성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에 의해 소생한 라자로(Lazarus)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위키백과에서 빌림.

♧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월간 『우리詩』 2025년 10월호(통권 44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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