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의 효용성 – 김경훈
작가회의 사무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6월 중순에 4•3 문학기행을 가는데 거기 자료집에 내 시를 싣겠다는 것이다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원고료는 15만 원인데 10만 원은 기행 뒤풀이에 쓰라고 했다 내 시가 다중의 밥이 되고 술이 되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 한가 거기다 5만 원씩이나 남지 않았는가

♧ 가을 감정 - 김광렬
사르르 바람이 나뭇잎들을 끌고 간다
애잔한 마음은 연민과 함께 찾아온다
저기 응달진 곳에 무덤들 즐비하다
아무리 생이 남루해도 햇살은 돋아나
떠나가는 마지막 목숨들을 비춰준다
뿔뿔이 흩어져가는 것들의 여윈 손
차게 제 머리칼 한 움큼 쥐어뜯을 때
눈물샘 가득 고여 나는 짜디짠 눈물
가슴이 허무로 꽉 찬 이런 날 나는
갈증으로 바작바작 타는 속 데리고
어느 맑은 술집이라도 찾아가야 하리
잘 가라 아름답고 적막했던 것들이여
이승에서 더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여
어느 날 숲길 걷다 만난 생명들이여
너희들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 잠시,
나는 또 무엇을 찾아 여기 머물면서
망설이고 헤매고 탄식하다 떠나갈까
어떤 목숨들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
지상의 애착을 내려놓지 못하는구나
떠나가기 싫다고 바르르 몸부림칠 때
누가 용렬하다고 나무랄 수 있는가
결국은 바람에 이끌려 무덤으로 가는
나뭇잎들, 나뭇잎들, 나뭇잎들 참 섧다

♧ 지상의 시간 – 김대용
그들의 표정과 말을 들으며 어린 시절
빛나는 일등병이 보물을 차지하는
딱지놀이를 떠올렸다. 앞으로 만 가다
한 번만 용감하고 끝나는 패
기도들이 마지막 희망이 되어버린다.
겨울의 동백꽃이 고개 숙이고
찢긴 마지막 달력을 덮고
아직도 언덕길 담장을 힘들게 오르는
덩굴장미는 평범한 이웃들이
혈맹으로 뭉쳐 치렁거린다.
공든 탑들이 무너지고 망가진다.
모래성이라 애태우다 분노하며 잃어버릴 것 같은
생각들이 모두 외로운 그림자 하나씩 끌어안고
길가에 앉아 기다린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흘러왔다는 생각에 갑자기 우리는
팔짱 낀 시인들이니 모두 어떠냐고 묻고 싶어졌다
새로 쓴 시가 궁금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이 처연한 목소리를 내는지
그리고 몇 사람이 읽었는지
나만 읽고 버려지는 감추고 싶은
짝사랑이듯 몇 자 쓰다 부끄럽다
밤새운 그들이 머리에 핀 동백 꽃송이들이
눈 속에 잠기고 그 잎은 젊음처럼 윤기 나고
때론 소란스러워도 되었다,
어느 해 여름 바닷가 모래 숲 모닥불
솔잎 며칠 타올랐다 부스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여한 없이 바라본다,
재가 남으리라 그리고 다시 생명을 품으리라
이름 없는 들꽃이면 어떠냐 피어라
벌이나 나비 한 마리는 찾아오겠지
아무런 약속이 없었고 단지 몽롱한
한때 풀리지 않던 이유를
이제 쉬운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맴돌던 치자 향기도 어느새 지워지고
책갈피 속 감추어진 낙엽 부스러지는
지워지지 않는
이렇게 얼룩지는 그리움이라는 것들

♧ 물이 시집간다 – 김병심
달이 머리를 올린다, 우물은 만삭
용암이 굳은 수궁에 고이는 물에는
이백 년쯤 묵힌 소원도 남아 있을 것이나
광령리 절에서 무릎이 다 닳은 물이 용당리 우물가로 시집을 간다
초야를 치르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나는
머리카락이 자랐다
누구에게나 머리카락은 동아줄이겠지만
나에겐 두레박이었다
바가지머리만 빼고 다 잘라내던 머리카락에 대해선
허공에 뜬 발목이 잡힌 어린 어머니에게 물어볼 일이다
성이 다른 이름만 낳아도
매번 딸만 낳는 어머니에게
머리를 땋거나 젓가락을 달구고 머리카락을 말아올리는 일은 배울 수 없었다
무릎 밑에는 항상 물이 차올랐으니까
딸도 아들도 아닌 나는 첫째도 막내도 아니었으므로
물려받은 바지를 입고 이름이 헷갈려도 흔해빠진 나의 고민일 뿐
튼튼하게 차라는 머리카락도 같은 처지
찾은 출항으로 여러 날 집을 비운 늙은 아버지에겐
어느 쪽이 아내인지 모르게 자란 딸들만 남았지만
나 또한 우물의 속내였다
절간의 우물에서 머리를 깎으면, 달이 시리다
시름 앓던 어머니의 소원으로 용당리 우물이 메워지고 나서부터
봄바람이 우물에서 건져 올린 건
무릎 밑으로 잘려나간 해묵은 머리카락이었다

♧ 익숙한 붕괴의 소리 – 김병택
얼마 전부터, 창에다 귀를 대면
서두르며 가까이 다가오는 게 있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때론, 벽면을 날카롭게 긁거나
쌓인 책들의 모서리를 두드리는
낯선 소리로 바뀔 때도 있었다
낭자하게 널린 주변의 빛들에
함부로 자주 부딪히고 나서야
도착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날
소리와 함께 찾아온 세월이
익숙하게 보이는 날개를 펴며
내 어깨 위에 조용히 앉았다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마에 남아 있던 붉은 상처도
그냥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나비처럼 주위를 날아다녔다
오늘, 창에 귀를 대고 들은 것은
어제의 소리와는 아주 달랐다
강물처럼 내밀하게 흘러와서는
부서졌고, 흩어졌고, 기울어졌다
젊은 시절에 귀 저리도록 들었던
익숙한 붕괴의 소리였다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가을(통권 제90호)에서
*사진 : 단풍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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