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턱*
봄까치꽃 지나 청보리밭 지나
덤펑덤펑 발 빠지는 모래밭 지나
여기까지는 아는 곳일 거야
지나면
너럭바위 틈으로 눈이 몽글몽글 솟아나
나무 타는 소리, 뒤에 잔기침이
물살을 밀어내지
여기는 겨울을 오래 앓는 곳이야
바람에 파래진 속살들과
떠는 발
바라보다 웃다가 서로의 어멍처럼
앓는 해국은 앓는 숨비기꽃을 품어 주고
앓는 등은 앓는 허리를 품어 주고
어제 허우적대던 숨이
오늘 허우적대던 숨을 안아야
불을 볼 수 있는 곳
봄이, 남은 겨울을 다 지펴도
한 줌의 겨울이 계속 남는 건
추위를 나누며 닮아 가길 바라서야
그곳에선 모두 바다를 닮아 간다지
그런데,
그곳까지 가려면 뼈마디에
물 찬 소리가 나야 해
---
* 돌담을 쌓아 바람을 막고 노출을 피하기 위해 만든 곳. 해녀가 물
질을 하다가 나와서 불을 피우며 쉬거나 옷을 갈아입는다.

♧ 날 설어올 적*
파도가 센 날은 갈치다방에 갔지
오간 데 많은 다방 레지들 속옷을
오갈 데 없이 앉아 빨았지
레지들 옷에서 사루비아가 피고
새털구름이 지나갔지 보송하고 말랑한 속살을 흉내
내듯
비누 거품이 가슴과 아랫배를 타고 흘렀지
바다에 들지 않아도 손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숨을 쥐어짜며 빨래를 했지
해가 설핏해져 사내들 몰려오면
다방 안을 가로지르고 나왔지
기지바지 입은 남편이 구두 흔들거리며
성냥 입에 물고 은빛 웃는 모습 몇 번 보았지
모래바람을 맞은 듯 종일 눈이 따끔거렸지
광목 물옷 입다가
첫애가 들어서자 고무 해녀복이 나왔지
몸에 물이 들어오지 않아 물질 오래 할 수 있어서
너도 나도 사는데
한 벌에
밭 두마 지기 값에 놀라
윗옷만 샀지
아래는 스타킹을 입으면 되니
스타킹은 다방 빨래해 주면
여러 벌 얻을 수 있었지
그런 물결도 있었지
---
* '우리 엄마 나 낳을 적에'라는 뜻으로 〈해녀 노 젓는 소리〉의 가
사 일부이다.

♧ 소라 통조림 공장
엄마가 소라를 한 짐 캐면
나는 통조림 공장에 져 나르고
공장 마당에 나은 언니는 화상 입은 손으로 소라를 받는다
언니가 양철 깡통 위에 앉아
펄펄 끓는 소라 솥을 지켜보며
녹슨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왈츠 리듬으로
세는 동안
나는 의자만 생각했다
왜 바다에는 의자가 없을까
왜 통조림 공장에는 의자가 없을까
누가 길에서 소라색을 물었을 때
이렇게 길게 되물어 대답을 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엔
끓는 솥에서 새는 김 소리와
비늘처럼 쌓인 깡통 더미를 헤집는 소리가 짙었다
언니는 그 소리를 따라 발끝으로 왈츠를 추며
빈 소라 구명 속에 노래를 넣어 주고 사라졌다
소라를 한 짐 내어 주는 엄마에게
이것이 희망인지 죽음인지 물었을 때
죽음이라도 다 건져 내면
바다에 희망이 남지 않겠냐 말하고 사라졌다
뜨거운 공장과 차가운 바다 사람들의
한쪽 눈에서 아침이 나오고
다른 한쪽 눈에서 밤이 새어 나왔다

♧ 겨울의 속도
얼굴을 버리고 왔다
어차피 우리는 알아볼 수 없고
눈동자는 종소리로 가득 찼기에
사슴은 해마다 류에게 울음을 배웠다
소라 껍데기 가득 실은 단추 공장* 리어카는
겨울의 속도처럼 여러 손으로 밀어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라인더는 제야 후렴구와 함께 한밤 넘어 돌아가고
포대 자루 로프를 풀면 어린 시다가
가지를 흔들며 나뭇잎을 따먹고 있다
밖은 별이고 안은 방향 잃은 먼지들이
구부러졌다 펴기를 반복하며
입안으로 떠나간 사랑의 문장을 넣어 준다
입김을 불면 치마에 싸인 아기가
깜박거리는 촛불을 빨다 목화 위로
쿨럭쿨럭 검은 아침을 쏟아 낸다
소라 껍데기가 동그란 주먹밥 같은 단추가 될 때
프레스 소리는 굴뚝만큼 솟아오른다
겨울을 건너는 류가 가슴을 치면
골목마다 사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알사탕 같은 눈이 가릉가릉 굴러다니고
류의 심장과 아기 심장을 맞대는 밤
단추 공장 창문 불빛들은 단춧구멍 보다 촘촘해
류는 헐겁게 휘청거리는 허리를 눕힐 수 없고
느리게 배밀이 하던 달을 눈구름이 묻고 있다
---
* 소라 통조림 공장 옆에 단추 공장이 있었다. 소라 껍데기로 단추
를 만들었다

♧ 물속 품
모든 유토피아는 빛이 가득한 섬으로 묘사된다는데
아버지가 밤에 쳐 놓은 그물을
아침에 걷으면
그물 속에 그물을 치는 아버지가 가득했다
밥상에 떨어진 물방울 하나를 손가락으로 끌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따라간다
꿈을 지고 가듯 위태롭게
꿈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속에서 발소리는
귀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아
하루가 절규로 넘쳐흐르면
뭍은 환호로 받아 간다
손가락 따라가는 물줄기가 수척해지지 않도록
숨을 쥐어 붉게 빛나는 아버지 하관下傾
아버지의 수많은 신발이 하늘을 날아가는 밤
어둠 앞에서 질끈 감아 본 적은 없는 눈이
빛의 공포에 감기기도 한다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 보나』 (걷는사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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