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무의 사랑
나무의 사랑은
기다림이라 한다
바람이 부는 날 벚나무는
분홍 꽃잎을 분분히 날리며
우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는데
아, 그때 사랑을 하고 있었을까
새소리. 귀뚜라미
숲을 떠도는 바람 소리
새벽이슬의 반짝임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
봄 햇살 화창한 밤
와르르 나온 별빛
소나기를 뿌릴 때
나무는 살랑살랑
세레나데를 흥얼대었다
비가 오는 날
겸은 너울을 쓰고
줄줄 내리는 나무들,
사랑은 기다림이라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 질경이
길가에 질경이 되리
질경이 사랑을 하리
외딴 길가
아무 발에나 밟히면서
네 아픔, 내 아픔
푸르게 껴안고
길가에 질경이 되리
질경이 사랑을 하리
기약도 없이, 행여
임 오시는 날
분홍도 빨강도 아닌
녹색 꽃인들, 이 하나로
나를 다 드리리라

♧ 행복 2
행복은
때때로 젖어오는 옛날
뜬금없이 떠오르는 미소
먼 제자의 소식 한 통
무선으로 물 건너오는 손녀
늙은 마누라 미인이라며
싱거운 박장대소
이끼 낀 우정, 한잔의 대화
행복은 화선지에
꽃처럼 번지는 그리움
눈시울 적시는 흰 구름 한 점
그 바닷가의 무언의 대화
새벽 산길에 벌레들의 합창
눈을 이고 선 백록담의 눈부심
가슴 시린 시 한 편
나의 길, 나의 노래

♧ 허공 4
-사랑
사랑을 만질 수 있나
나뭇잎 새로 싱그러운 햇살과
네 흔들림 사이로 내가 쓸쓸하고
눈을 감고서야 사랑을 만질 수 있었네
저 투명,
유려한 선으로
하늘 산 바다
다 그려놓았네
그로 하여
나무는 나무가 되고
딱정벌레의 금빛 날개와
꽃은 꽃으로 피어나고
뭇 생명 위로 해와 달은
빛나고 있네
하염없이 무량하여
스스로 빛나는 모든 것들
비로소 우주를 완성하였네
다만 저는 없음으로 가득하여

♧ 나무에 기대어서
나무에 기대어서
나무처럼 생각하고
나무처럼 바라보고
나무의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나무가 되어
당신의 슬픔과
당신의 아픔으로
흔들리고 싶습니다
말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당신의 눈 속에
내가 있어, 당신의 눈으로
이윽히 나를 바라봅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에게로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나는 얼마나 무심한 돌부처였는지
나로 하여 얼마나 슬프고 아팠는지
나무가 되어
나무로 흔들리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당신에게 들어가는 길을
손을 잡고 함께 우는 법을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 (푸른생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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