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엄밧동산 서녘 밭*
아비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시들 때쯤
산물**이 익었다
아이가 울 때 마른 젖을 빡빡 빨 때
산물을 씹었다
안간힘이란 단물을
우려내고 우려내는 일
겨울을 우리고 우려내면
가까이 오려는 사람이 있다
부르면 얼굴이 나타나고
만지면 붉은 숨 쉴 것 같은
또렷한 빛과 색으로 다가오려는 안간힘
산물 나무 사이에 두고 한 걸음 떨어져
마주 보고 서 있어도 뒤엉킨 삶을 잃어버려
산물을 씹는다 아기는 제 배고픈 울음을
잊고 기억하고 잊고 기억하는 안간힘으로
하루하루 크고 눈을 내리는 안간힘으로
겨울은 봄을 불러온다
1947년 3월 1일 제주는 사랑과 이념의 안간힘으로 죽음으로
공포와 탄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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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12월 13일, 토벌대는 엄밧동산 서녘 밭에서 주민 48명을 공개 총살했다 총살당한 주민 중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등에 총을 맞고도 몸을 일으켜 “남로당 만세”를 불렀다. 다시 머리에 총을 맞은 할아버지는 결국 쓰러졌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고모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배 속의 아버지를 안고 총살 장면을 내내 봐야 했다
** '산귤‘의 제주어.

♧ 빌레못 굴*
아버지는 두더지 외눈박이 눈으로 나를 지하 방에서 키우셨네 나는 빌딩 아래의 언어만 듣고 자랐네 천장이 낮은 집에서 반음 낮춘 몸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손톱에 입김을 불어 넣었네 가끔 손톱 끝에 분홍 파도가 치면 지상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았네 어둠 속에서 구부러진 이름을 꺼내 차례차례 펴는 소리가 우리의 유일한 노래네 가만히 들어 보니 아버지 울음이었네
마을 아래 수군거리던 소문은 찢긴 새의 날개처럼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계절마다 되돌아가지만, 지상 위 저버린 별과 달을 물고 와 더듬더듬 벽을 밝혀 주었네 우리가 바라보는 유일한 별자리이네 하루는 아버지가 상처 난 앞발을 밤새 핥고 있었네 반쯤 잘린 앞발은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고 땅을 파지도 못하고 감자알처럼 아버지 옆구리에 매달려 있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였네
이랑 밖으로 나와 햇살을 마주한 감자를 사람들은 독이라 자꾸 잘라 내려 하기에 감자는 이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서로의 얼굴을 흙 속으로 깊이 밀어 넣네 하루는 지상 위로 내민 아버지 얼굴을 사람들이 걷어찼네 아버지 볼이 푸르게 부어 있었네 아버지는 몸부림치듯 땅을 파 감자를 깊이깊이 밀어 넣네 눈이 있어도 서로를 외면하는 마을 아래 눈이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하는 우리, 우리가 모여 사네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로의 의심과 미움 눈물이 모여 마을을 받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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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당시 제주 애월면 어음리 빌레못굴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던 마을 주민,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 30여 명 가운데 29명이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 보리 익을 때면 멜* 철이다
마당에서 한편에 목욕물 데우던 큰 솥 두 개에 팥축**이 가득했네 뒷집 삼춘은 할머니를 향 물로 닦고 백지와 솜으로 눈, 코, 입을 막았지 동녘 방에는 이모들이 모여 앉아 두건과 상복을 지으며 가끔 고개를 들어 바다 대신 올레 밖 보리밭을 보았고
집 안 바케쓰와 양푼을 크기 별로 모아 놓고 바가지로 팥죽을 퍼 담았다 바케쓰는 장례를 도와줄 가까운 친척과 괸당*** 집, 양푼이는 상두꾼 부탁할 집에 바삐 가져가 상을 알리니 염이 끝나고 상두꾼들은 바깥채에 빈소를 차리고 마당에 천막 치고 소낭**** 밭에 토롱을 만들었다 나는 지네를 잡으러, 할머니는 삭정이 주우러 가던 곳 양지보다 음지가 많은 곳이나 후릿그물 던져 놓은 듯한 보리밭과 멜 빛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지관이 언제 왔다 갔을까 4•3 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재가했던 일이 있어 합장이 안 된다고 했지 안타까운 마음인지 흉인지 모를 소리, 팥죽 먹는 내내 듣다 곡 시간이 되면 얼굴을 가리고 곡을 했네
장례 치르기 좋은 넓은 마당이었다 팥죽 있던 솥에 돼지를 삶고 창고 정리해 조문객 받을 준비를 했다 상집에 몰려드는 귀신들이 시끄러운 소리에 달아나야 한다며 명석을 펴고 윷판을 벌이고 술상도 차려졌다 돼지고기 익는 냄새에 보채며 마당을 뛰어다니며 우는 아이를 몰래 불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 주며 무 써는 칼질 소리, 그릇 세는 소리, 설거지 소리로 여자들은 울었다 밤새 마당에 불이 켜졌고 손은 새까맣고 보리는 누렇게 여물어 조등처럼 환했다
일포 소식은 전화가 오는 소식보다 빠르게 바람을 타고 이쪽저쪽 갈라져 방향을 바꾸며 제주를 돌아다녔네 집안 첫 상이라 동네 넘어 오름 마주한 마을, 한라산 너머 마을, 물살 다른 바다 마을 손님들이 아침부터 집안이며 천막 아래 조문객으로 꽉 찼지 긴 상복 입고 고깃반과 밥을 내가면 몇째 손주냐 물음을 위로 대신 받았지 세 번째 손주라 눈물로 대답할 겨를 없이 국을 내가고 나물을 내가고 또 손님을 받다 곡 시간이 되면 실컷 곡을 했네 멜떼 같은 아이들은 여문 보릿가지를 꺾어다 명정銘旌처럼 흔들며 웃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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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의 제주어.
** 제주에서는 장례 그 집안의 사돈댁에서 팥죽을 쑤어 온다.
*** '친족‘의 제주어.
**** ’소나무‘의 제주어.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걷는사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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