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안하다
1. 들꽃에게
보랏빛 네게 어찌 이름이 없으라만
명색이 시인이라며 두루뭉술 들꽃이라니
네 이름 들고 가보니 벌써 지고 말았구나
2. 제비꽃에게
겨울 지난 잔디밭에 보랏빛 너무 곱다
설 자리 잘 모른 꽃 모질게 뽑으면서
오랑캐 오랑캐꽃이라며 못난 변명 미안타
3. 하늘에게
그 맑던 가을 하늘 먹구름에 덮였어도
또다시 파란 모습 명하니 바라본다
우러러 부끄럼 없다는 시인 보기 부끄러워
4. 땅에게
뚜렷한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 놈이
꼬박꼬박 하루 세끼 비싼 쌀만 축내는군
콩 세 알 그도 나눠 먹던 옛 어른 오늘 본다
5. 새에게
꿈 속을 헤매는 나 깨우러 오셨는가
창가에 울다 지쳐 자지러지게 노래한다
그 외침 못 알아들어 아 벌써 봄이 왔나
6. 감나무에게
여름엔 그늘 주고 가을엔 열매 익혀
다 태워 주고서도 다소곳 선 감나무
웃자란 나도 못 자르며 전정 가위 들고 섰다

♧ 억새 앞에서
시간이
아픈 시간이 강처럼 홀렸어도
언제나 되돌아오는
아픔이 너무 깊다
다랑쉬
억새 앞에서
무릎 꿇어 보았는가
울컥울컥 토하는
핏빛 울음 쌓인 곳에
머리 풀고 꼿꼿이 서서
외치는 소리 들었는가
죄 없다
못 배운 한이 커
모진 땅에 뿌리 뻗을 뿐
해원굿 춤사위 타고
산 자여 울어보았나
열 한 분* 그뿐이라
수천수만 한이 묻힌
큰 무덤
텅 빈 가슴에
쑥부쟁이 홀로 곱구나
---
*다랑쉬 오름 동굴에서 발견된 4•3 희생자 열 한 분.

♧ 좋은 술은
아무거나 삭힌다고
좋은 술이 된다더나
좋은 쌀 맑은 물에 누룩이 익었어도
알맞게
손길 닿아야
깊은 맛이 나는 거지
시인이 쓰기만 하면
좋은 시가 된다더나
꽃 넣고 하늘 담고 난향까지 넣은 후에
마지막
시안詩眼을 찾아
점 찍어야 화룡점정畵龍點睛

♧ 팔만대장경
법정 스님 가셨지만
이 말은 남아있다
보시 많이 하지 말아
절은 가난해야 한다
비워야
채워지는 게
그 어디 절만이라
금과옥조 대장경도
빨래판 같다는 어느 할매
그저 스친 말이지만
부처님 말씀이다
맘에 낀
얼룩진 때를
깨끗이 빨라는 법어

♧ 찻잔 앞에서
식어가는 찻잔 속에
다른 생각 넣지 마라
깊은 눈으로
나를 다 읽은 스님
무아無我를
알고 싶으면
무념無念부터 찾으란다
*고성기 여섯 번째 시집 『섬은 보고 싶을 때 더 짜다』 (그림과책,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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