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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고성기 시집 '섬은 보고 싶을 때 더 짜다'의 시(3)

by 김창집1 2025. 11. 17.

 

 

♧ 미안하다

 

 

1. 들꽃에게

 

보랏빛 네게 어찌 이름이 없으라만

명색이 시인이라며 두루뭉술 들꽃이라니

네 이름 들고 가보니 벌써 지고 말았구나

 

2. 제비꽃에게

 

겨울 지난 잔디밭에 보랏빛 너무 곱다

설 자리 잘 모른 꽃 모질게 뽑으면서

오랑캐 오랑캐꽃이라며 못난 변명 미안타

 

3. 하늘에게

 

그 맑던 가을 하늘 먹구름에 덮였어도

또다시 파란 모습 명하니 바라본다

우러러 부끄럼 없다는 시인 보기 부끄러워

 

4. 땅에게

 

뚜렷한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 놈이

꼬박꼬박 하루 세끼 비싼 쌀만 축내는군

콩 세 알 그도 나눠 먹던 옛 어른 오늘 본다

 

5. 새에게

 

꿈 속을 헤매는 나 깨우러 오셨는가

창가에 울다 지쳐 자지러지게 노래한다

그 외침 못 알아들어 아 벌써 봄이 왔나

 

6. 감나무에게

 

여름엔 그늘 주고 가을엔 열매 익혀

다 태워 주고서도 다소곳 선 감나무

웃자란 나도 못 자르며 전정 가위 들고 섰다

 

 



♧ 억새 앞에서

 

 

시간이

아픈 시간이 강처럼 홀렸어도

언제나 되돌아오는

아픔이 너무 깊다

다랑쉬

억새 앞에서

무릎 꿇어 보았는가

 

울컥울컥 토하는

핏빛 울음 쌓인 곳에

머리 풀고 꼿꼿이 서서

외치는 소리 들었는가

죄 없다

못 배운 한이 커

모진 땅에 뿌리 뻗을 뿐

 

해원굿 춤사위 타고

산 자여 울어보았나

열 한 분* 그뿐이라

수천수만 한이 묻힌

큰 무덤

텅 빈 가슴에

쑥부쟁이 홀로 곱구나

 

 

---

*다랑쉬 오름 동굴에서 발견된 4•3 희생자 열 한 분.

 

 



♧ 좋은 술은

 

 

아무거나 삭힌다고

좋은 술이 된다더나

좋은 쌀 맑은 물에 누룩이 익었어도

알맞게

손길 닿아야

깊은 맛이 나는 거지

 

시인이 쓰기만 하면

좋은 시가 된다더나

꽃 넣고 하늘 담고 난향까지 넣은 후에

마지막

시안詩眼을 찾아

점 찍어야 화룡점정畵龍點睛

 

 



♧ 팔만대장경

 

 

법정 스님 가셨지만

이 말은 남아있다

보시 많이 하지 말아

절은 가난해야 한다

비워야

채워지는 게

그 어디 절만이라

 

금과옥조 대장경도

빨래판 같다는 어느 할매

그저 스친 말이지만

부처님 말씀이다

맘에 낀

얼룩진 때를

깨끗이 빨라는 법어

 

 



♧ 찻잔 앞에서

 

 

식어가는 찻잔 속에

다른 생각 넣지 마라

깊은 눈으로

나를 다 읽은 스님

무아無我를

알고 싶으면

무념無念부터 찾으란다

 

 

        *고성기 여섯 번째 시집 『섬은 보고 싶을 때 더 짜다』 (그림과책,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