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대리 – 이현
긴 눈 그친 후
겨울숲을 가서 보았다
단단한 영혼의 뼈로 우뚝 서서
바람의 칼로 상처를 도려내고
천형처럼 외롭고 가난히 서 있는 시인들
바람은 안에서 나와 온 숲을 흔들고
자작자작 소신공양 살을 태운 영혼들
번뇌로 타오르던 모든 색 다 놓아버리고
수묵화 한 폭 펼쳐놓은 듯
노승의 사리로 서서 허공을 예불하는
흰 장삼자락 단정히 팔 벌린 자작나무들

♧ 뿔호반새 – 김석규
매주 보내오는 고향 소식인 〈함양신문〉
하나도 놓지지 않고 다 살피는데
보이지 않던 뿔호반새가
75년 만에 지리산 자락에 나타났단다
사냥하는 수달의 주변을 따라 돌며 도망치는 물고기를 잡고
찍 찌이익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나
오염을 모르는 청정지역인 고향
어류로는 여울마자 모래주사 꼬치동자개 얼룩새코미꾸리 큰줄납자루
포유류는 삵 수달 담비
파충류는 남생이
조류로는 호사비오리 흰꼬리수리 흰목물떼새 잿빛개구리매 참매 수리부엉이 팔색조 원앙 등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이 아직도 서식하는
단연 생태 경관 보전지역으로는 으뜸인 고향
뿔호반새 일족들 날로 번창하기를

♧ 나무라면 – 황현중
이 세상을 다시 살라 한다면
나무로 살면 더없이 좋으리
정이품正二品 소나무나
천년을 거느린 거목도 좋을 테지만
죽은 채로 되사는
나무라면 더없이 기쁘리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아니라도
고관대작의 서까래가 아니어도
고개 숙여 기도하듯 식사를 하는
그 밥상이면
그 밥상 위에
마음의 심지 밝히고 고요히 일기를 쓰는
그 책상,
그 책상 위에
키 작은 연필이면
늦어도 아주 늦은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겨우
서툴게 배운 글자로
한 땀 두 땀 시를 수놓은
첫눈처럼 설레는 백지이면
속세를 깨우치는
고승의 목탁이 아니라
콩 심은 데 콩 나는
정직한 밭두렁 콕콕 찍는
여든 먹은 늙은 호밋자루면 더 좋으리

♧ 그리팅맨*
그와 나란히 북쪽을 향해 고개 숙입니다
내 그림자는 나보다 더 길게 고개 숙입니다
더 이상 심장을 피에 파묻지 말자고
자유여, 이제 손 놓지 말자고
연강 나룻길 임진강 너머의 저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습니다만
건네야 할 절실한 인사말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봉합하지 못한 단절에 길들어진
쓸모없는 모르쇠 말들이 뒤엉켜
화해와 어우름의 말을 막아섭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정히 악수하고 싶습니다
두 번보다 힘든 한 번의 용기,
악수 나누는 그 순간을
눈물로 기다리는 마음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리팅맨과 그림자가 북쪽 향해 정중히 악수를 청합니다
---
* 조각가 유영호 작품. 북한과 4km 떨어진 연천군 옥녀봉에 10m 높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15도 각도로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거인의 모습을 한 인공 조형물.

♧ 상자와 나 - 이송희
상자 속에 눕는다,
흰 나무벽 사이에
숨 쉴 때마다 흩어지는 초록의 방울 소리
빛들은 문틈에 걸려
가늘게 찢어진다
나의 몸과 불안을 침묵 속에 담으며
오래된 손잡이의 모서리를 닦는다
시침은 좁은 틈에 묶여
속절없이 느리다
스스로 갇힌다는 건 고통이 아니라
내 안을 꿰뚫어 보는 두 눈을 갖는 일
빈 벽을 마주하면서
불현듯 떠올랐다
마음을 닫는다,
아무도 모르게
비좁고 어두운 나무의 방에 눕는다
갇힘과 긁힌 자유가
한참을 꿈틀거렸다
*월간 『우리詩』 2025년 11월호(통권 제44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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