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변비에 걸린 시
펜 끝을 흘러나온 사유들이 세간에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는 동안 내 시들은 꼬리가 길어 밟혀 왔다 잡아당기기엔 이미 흘러간 물이다 꼬리를 줄여라 꼬리를 줄여라 한 줄기 연약한 사유의 호소마저 집어삼킨 채 긴 세월 덫틀에 갇혀 엉킨 뱀의 무리처럼 허멩이문세*만 날름거리게 하던 내 낡은 사유들이 지금 심한 변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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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멩이문세: '쓸모없게 된 문서‘의 제주어

♧ 산나리꽃을 보며
비탈진 가시밭길 지나
벼랑 끝 바위에 새치름히 핀 산나리
바람이 달려들수록
꽃날개 뒤젖히며 가슴팍 더 내미네
일생을 걸고 핀 저 당당함
목숨 하나 겨우 달고
둥지 언저리에
어정쩡히 핀 나는 기가 죽네
저 붉은 꽃송이처럼
한생을 피었다 지고 싶은데
문득 보이는 세월
앞으로 갓 명령만 받았는 듯
나를 지나는 바람보다 앞에 서서
늙은 병정처럼 가고 있네

♧ 가을, 생각
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는
바깥에서 생각을 그렸다
나는 집에 들어와 생각을 그렸다
생각은 생각 속에서
밤을 뒤척이며
제 몸에다 생각을 그렸다
생각을 품에 안은 세상은
가을, 미치게 사랑하다가
뜰에다 그대를 앓는다
나는 밖으로 나와
내 생각 훔쳐간 단풍나무를 본다
아, 가을이 운다

♧ 보름ᄃᆞᆯ광 갈ᄇᆞ름
다 ᄀᆞ득은 보롬ᄃᆞᆯ
나 대력* 서펜더레
눈 벌겅케 감ㅅ구나마는
오는 새 읏인 이녁
저 ᄃᆞᆯ 보멍
ᄆᆞ심이라도 보낸 셍
소로록
나 쿰에 드는
스리슬짝 갈ᄇᆞ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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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력 : 대신
* 갈ᄇᆞ름 :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 뚜껑
누군가
나에게 물 같다 하기에
나는 물이구나 생각하다가
소중하게 부어내고
다시 채워두는 일을 생각하다가
누군가
나를 열어 놓는 그 누군가
마시고
사랑과 세상을 다시 채워
닫아 주기를 생각하다가
아 나는
절제 능력이 부족한
다 쏟아지고야마는 빈 병
이만큼 살며
겨우 알아낸 생각
나는 뚜껑이 필요하다
*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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