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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의 시(5)

by 김창집1 2025. 11. 20.

 

 

♧ 변비에 걸린 시

 

  펜 끝을 흘러나온 사유들이 세간에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는 동안 내 시들은 꼬리가 길어 밟혀 왔다 잡아당기기엔 이미 흘러간 물이다 꼬리를 줄여라 꼬리를 줄여라 한 줄기 연약한 사유의 호소마저 집어삼킨 채 긴 세월 덫틀에 갇혀 엉킨 뱀의 무리처럼 허멩이문세*만 날름거리게 하던 내 낡은 사유들이 지금 심한 변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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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멩이문세: '쓸모없게 된 문서‘의 제주어

 

 



♧ 산나리꽃을 보며

 

 

비탈진 가시밭길 지나

벼랑 끝 바위에 새치름히 핀 산나리

바람이 달려들수록

꽃날개 뒤젖히며 가슴팍 더 내미네

일생을 걸고 핀 저 당당함

목숨 하나 겨우 달고

둥지 언저리에

어정쩡히 핀 나는 기가 죽네

저 붉은 꽃송이처럼

한생을 피었다 지고 싶은데

문득 보이는 세월

앞으로 갓 명령만 받았는 듯

나를 지나는 바람보다 앞에 서서

늙은 병정처럼 가고 있네

 

 



♧ 가을, 생각

 

 

마당에 서 있는 단풍나무는

바깥에서 생각을 그렸다

나는 집에 들어와 생각을 그렸다

 

생각은 생각 속에서

밤을 뒤척이며

제 몸에다 생각을 그렸다

 

생각을 품에 안은 세상은

가을, 미치게 사랑하다가

뜰에다 그대를 앓는다

 

나는 밖으로 나와

내 생각 훔쳐간 단풍나무를 본다

아, 가을이 운다

 

 



♧ 보름ᄃᆞᆯ광 갈ᄇᆞ름

 

 

다 ᄀᆞ득은 보롬ᄃᆞᆯ

나 대력* 서펜더레

 

눈 벌겅케 감ㅅ구나마는

오는 새 읏인 이녁

저 ᄃᆞᆯ 보멍

ᄆᆞ심이라도 보낸 셍

 

소로록

나 쿰에 드는

스리슬짝 갈ᄇᆞ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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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력 : 대신

* 갈ᄇᆞ름 :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 뚜껑

 

 

누군가

나에게 물 같다 하기에

나는 물이구나 생각하다가

 

소중하게 부어내고

다시 채워두는 일을 생각하다가

 

누군가

나를 열어 놓는 그 누군가

마시고

사랑과 세상을 다시 채워

닫아 주기를 생각하다가

 

아 나는

절제 능력이 부족한

다 쏟아지고야마는 빈 병

이만큼 살며

겨우 알아낸 생각

나는 뚜껑이 필요하다

 

 

              *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