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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길 위에 있네
나는 늘 길 위에 있네
강쟁들을 건너고 강쟁제를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며
내가 꽃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네
미로 같은 세상 잠시 잊어버리고
나는 길 위에 마음을 두네
마음 끝자락 찌꺼기를 털어 내고
새 잎이 돋아나는 봄나무가 되고 싶네
길이 막히면 되돌아 나오고
길이 없으면 마음에 길을 내보기도 하네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힐 때
나는 작은 배낭을 챙겨 길을 나서네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네

♧ 마라톤 – 김정옥
기어갑니다
기어갑니다
달팽이보다 느리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몸이 뒤집히는 일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점차 다리 힘이 빠지고
온몸에서 피가 쏟아질 듯했습니다
팔십 고개 구십 고개 할딱 고개를 넘을 때마다
쇠똥구리처럼 더디게 기었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에도 숨이 찹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조금씩 조금씩 마지막 관문으로
다가갑니다
먼저 도착한 지아비와 막둥이가
힘내라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결승선이 저만치에 보입니다

♧ 달 – 나병춘
풋풋한 풋과일 같은
순수하고 하안
아가 웃음 같은
해말간 샘물 같은
달
깨물어 주고 싶은
시원하고 달콤한
아늑한 등지 같은
짜릿한 첫사랑 같은
달
느낌표 물음표 같은
말없음표의 발자국 같은
어머니 미소 닮은
저 포근한 달
고향길 가다
우연히 만나
한잔 나누고픈
달
달은 무수하나
단 하나
눈시울 그렁그렁
눈부처처럼 사무치는
당신이라는
달

♧ 거울 – 남대희
들여다보면
물에 잠긴
낯선 파편이 흔들린다
입술 끝 상처까지도
새벽빛 은밀히 매만지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새가 날개를 떨며 일어난다
불안은 늘 단단하고
잠들지 않는 내일 앞에서
나는 다시 나를 건너올 수 있을까

♧ 전등사 가는 길 – 김종숙
고려 가궐지 터 찾아 전등사 가는 길
좁은 계단 참 목포식당 고향 아짐처럼 아직 거기 살고 그 옆 삼학장 여관 기억 안으로 불러오고 싶은 사람처럼 거기 남아
전등사 길 안내한다
고려 오백 년 성쇠가
흰 눈발로 흩뿌리다가 멈추다가
멀리 주차 사무원 밀문 밖 나와 손가락 둘 펼치며 다가선다
- 어르신 추운데 안에서 받으시지 않구요
그 말 받아 무어라 하신다
- 강화말씹니껴?
그렇다 하신다
고려 오백 년이 눈발 따라 왔던가
건백평야 흙냄새 달고 온 고려적 사람, 예 아직 시처럼 살고 있네
*월간 우리詩 2025년 11월호(통권 제44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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