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궤
밖에서 들여다보면 짙은 어둠
안에서 내다보면 보이는 빛
햇살이 들지 않는 깊은 구석
시간을 거슬러 가는 공간
어둠의 한구석 깨진 그릇들
모여 있는 돌무더기
이 어둠에도 누군가 살았다
때죽나무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여인
용암 줄기를 따라 소곤대며 노는 아이들
입구에 바위처럼 굳은 채
밖을 보며 보초서는 남자
주름 가득한 노인과 아기 안은 어린 여자가
떠는 몸을 감싸며 살았다
바위 벽면에 새겨진 용암 결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숨을 가르던 시절
어둠 속에 숨죽인 채
바라보던 희미한 빛줄기
밖으로 나가 햇살 속에 설 날들
꿈꾸며 살던 궤
벽면 구석구석에 박히고 말았다
안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냉기는
긴 시간을 견딘 이들의 숨결
안을 들여다볼수록
숨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용암 결에 박혀 굳은 채
시간을 거슬러 잘도 넘어왔다

♧ 장두의 길
신평에서 의기 세워 출정한
장두 재수의 길을 따라간다
외세를 몰아내려
일뤠할망 앞에 자기 몸을 올려 제를 지내
포수들의 마음을 잡은 날
죽음의 길을 걷는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길을 따라 비춘다
성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
멀리 보이는 오름 능선
구름 너머 붉은 세상을 본다
불타는 하늘과 맞닿은 경계선 너머
계급 없는 세상은
외세도 없고 양반도 없는 세상은
저 너머에 있을까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 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싸워야 하는 것을
목숨을 내놓아야 새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산을 넘어가는 길
무너지는 나라를 바로잡는 길
죽음 넘어 새 세상으로 가는 길
나는 정당하며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길을 걸으며 올려다보는데
한라산 자락에 구름이 살짝 걷히자
희미하게 장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
*장두 이재수의 마지막 말 중.

♧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온다
붉은 달이 뜨면
붉은색이 수채화처럼 번진다
세상을 덮는 주술의 색
덧칠해지는 순간
저쪽 세상과 겹쳐지는 섬
사라진 사람들이 넘어온다
뫼동산* 깊은 자리에서 파헤쳐
뼈마디 달그락거리며 올라온다
달빛에 젖어 묽어진 흙을
진득하게 뒤집어쓰고 걷는다
폭력이 물감처럼 뿌려진 시절
광기의 창에 사라진 사람들이 걷는다
사상으로 얼룩진 섬
붉은색으로 묻힌 사람들이 걷는다
올레만 간신히 남은 마을로
주인 잃은 대나무들만 남은 집터로
녹아 사라진 살을 찾아가는 길
잊힌 핏줄을 돌아보는 길
붉은 달 아래 걷다 사라질 즈음
묻힌 자리로 돌아가는 이름들
다시 살아난 이름들을 보며
산 사람들이 웃는다
뼛조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오늘도 산 사람들은 섬을 파헤친다
---
*제주국제공항 내 제주4•3 행방불명인 유해 매장 추정 지역.

♧ 구술
지팡이에 의지한 손
문신처럼 새기진 주름들이 기억을 토해낸다
두린 아시 심엉 대당밧디 곱앗주
마을 사른 불이 대당도 태와신디
다닥다닥 대낭 비명소리 덕에
소곱에 곱은 우린 살앗주
살젠 ᄒᆞ난 살아집디다
살젠 ᄒᆞ난 물질도 ᄒᆞ엿주
물질 ᄒᆞ여가난 하근디 다 댕겨졋주
뼈마디 시큰ᄒᆞ여도 바당엔 들어갓주
팔남매 ᄆᆞᆫ딱 질룬 날
피난에 갈라진 아바지 수형인명부로 돌아왓주
무기징역이엔 써져신디
아바지는 농부엿주
무사 경 ᄒᆞ여신고
구술을 듣고 문밖을 나서는데
앞이 컴컴한 밤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시린 바람에 몸서리쳤다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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