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집 머리에 얹다
혼자 온 길
홀로 가면서
행간을 살리고
여백을 넓히고 싶어
늙마의 마당 한편
한등寒燈 하나 내걸고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의 세월이 떨어뜨린
삶의 부스러기를 하나씩 주위 모았다.
을사년 가을, 세란현洗蘭軒에서
홍해리 적음.

♧ 꿈속에서 쓴 시
언뜻 생각이 떠올라
끼적여 놓았다
잠시 후
또한 줄을 썼다
또한 생각이 나
또 썼다
그릴 듯한 시가 되었다.
잠 깨어 머리맡 백지를 보니
쓴 위에 또 쓰고
그 위에 또 쓴
누구도 읽을 수 없는
한 줄뿐
까맣게 반짝이는
시 한 편.

♧ 곡선의 시
직선의 시는 싫다
맛도 없고 졸음이 온다.
곡선이 있어 번짐이 있는 시
조용히 스미고 가만히 번져드는
떨리는 거문고 현처럼
느리게 가슴을 울리는 시
그런 시가 좋다.
그러니 시가 익을 때까지
진드근히 기다리거라.
아비다리하지 말고
진동한동하지 말고
초벌 매고 이듬매기하면서 농사 짓듯이,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그렇게 해서
날을 세우듯이
이드거니 다듬으면서 기다리거라.

♧ 추억
바다는 잔잔했다
막 떠오른 해가 금빛 햇살을 내리꽂고 있었다
실로폰 소리가 통통 튀어오르고 있었다
보랏빛이었다
어디선가 젖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8월이 느릿느릿 바닷가를 돌아가고 있었다
저 거대한 짐승이라니!

♧ 2020 . 봄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고
새가 울어도
울림이 없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없다
비참한 봄이다
환멸의 봄이다.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도서출판놀북, 2025)에서
*사진 :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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