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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의 시(1)

by 김창집1 2025. 12. 3.

 

 

♧ 自序

 

 

 여름이 길어졌고

 

 바람이 잠깐 스치더니

 

 불현듯,

 

 풀벌레 소리가 고요해졌다

 

 먼 데서 사무치게 우는

 

 얼굴 없는 이에게

 

 

                        2025년 11월

 

                                강은미

 

 



♧ 네가 필요해

 

 

신문지에 싼 감자에서

싹이 나고 있다

 

곰보자국 굳은 상처엔

독이 자라고 있다

 

누군가 베어내기 전

푸른 자궁이 열려야 한다

 

 



♧ 필사

 

 

어떤 숨 하나가 엉키고 달라붙어서

기괴한 숫자를 달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

내 생애 최초의 기록

울어도 대답 없는

 

종잇장 같은 숨을 한 번 접고 문지르며

얼룩진 무늬 반대편을 조용히 펼쳐 봐도

선대칭 삶의 무늬는 덧대어진 누더기

 

투명한 습작의 살얼음은 손댈수록

깨지고 흐려져서 옴싹달싹 할 수 없고

우연한 반사효과에 뺨 한쪽이 다 타버린

 

걸어온 길의 반은 찢기고 무너진 채로

되돌아갈 산허리의 반은 이미 젖어버린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둥근 밤의

 

레코드

 

 



♧ 양마단지

 

 

보연이네 담장 밑에 마농꽃이 피었다

 

오토바이 뒷자석에 탄 친구가 단단했다

 

단단이 바퀴를 달면 당당해지나 싶다가

 

오갈 데 없어 과수원 집 심부름 하러 온

 

슬이 오빠 생각에 받침이 자꾸 신경 쓰였다

 

남자가 이름이 예쁘다고 머리를 많이 맞았다

 

사람이 가늘고 길고 뾰족해서 쓸 데가 없다고

 

약 치고 공 치던 날에 입은 옷 그대로 나갔다

 

두 시간 기다려야 하는 버스가 금방 와버렸다

 

벗어 둔 고무신에 바퀴를 달고 싶었다

 

달은 가만 있어도 버스보다 빠르고, 멀리

 

마농꽃 노란 입술이 새파랗게 밤새 떨었다

 

 



♧ 제7일

   - 영화 '토리노의 말'에 부쳐

 

 

비가 오지 않아 죽은 뱀이 물탱크 바닥에 달라붙었다

 

마차에 실려 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정지문 한 곁에 묻어둔 씨감자에 손을 댔다

 

뱀 꼬리에 손을 댄 것처럼 차가웠다

 

돌무더기에 감자를 털고 한 홉의 빗물로,

 

얌전한 손놀림으로,

 

흐린 눈으로,

 

대나무 타는 소리에 서까래가 무너졌다

 

쥐약 먹은 개가 재를 뒤집고 불타올랐다

 

세계가 조용한 흐름으로 암전되고 있었다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