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自序
여름이 길어졌고
바람이 잠깐 스치더니
불현듯,
풀벌레 소리가 고요해졌다
먼 데서 사무치게 우는
얼굴 없는 이에게
2025년 11월
강은미

♧ 네가 필요해
신문지에 싼 감자에서
싹이 나고 있다
곰보자국 굳은 상처엔
독이 자라고 있다
누군가 베어내기 전
푸른 자궁이 열려야 한다

♧ 필사
어떤 숨 하나가 엉키고 달라붙어서
기괴한 숫자를 달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
내 생애 최초의 기록
울어도 대답 없는
종잇장 같은 숨을 한 번 접고 문지르며
얼룩진 무늬 반대편을 조용히 펼쳐 봐도
선대칭 삶의 무늬는 덧대어진 누더기
투명한 습작의 살얼음은 손댈수록
깨지고 흐려져서 옴싹달싹 할 수 없고
우연한 반사효과에 뺨 한쪽이 다 타버린
걸어온 길의 반은 찢기고 무너진 채로
되돌아갈 산허리의 반은 이미 젖어버린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둥근 밤의
레코드

♧ 양마단지
보연이네 담장 밑에 마농꽃이 피었다
오토바이 뒷자석에 탄 친구가 단단했다
단단이 바퀴를 달면 당당해지나 싶다가
오갈 데 없어 과수원 집 심부름 하러 온
슬이 오빠 생각에 받침이 자꾸 신경 쓰였다
남자가 이름이 예쁘다고 머리를 많이 맞았다
사람이 가늘고 길고 뾰족해서 쓸 데가 없다고
약 치고 공 치던 날에 입은 옷 그대로 나갔다
두 시간 기다려야 하는 버스가 금방 와버렸다
벗어 둔 고무신에 바퀴를 달고 싶었다
달은 가만 있어도 버스보다 빠르고, 멀리
마농꽃 노란 입술이 새파랗게 밤새 떨었다

♧ 제7일
- 영화 '토리노의 말'에 부쳐
비가 오지 않아 죽은 뱀이 물탱크 바닥에 달라붙었다
마차에 실려 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정지문 한 곁에 묻어둔 씨감자에 손을 댔다
뱀 꼬리에 손을 댄 것처럼 차가웠다
돌무더기에 감자를 털고 한 홉의 빗물로,
얌전한 손놀림으로,
흐린 눈으로,
대나무 타는 소리에 서까래가 무너졌다
쥐약 먹은 개가 재를 뒤집고 불타올랐다
세계가 조용한 흐름으로 암전되고 있었다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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