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름 - 백수인
그들은 솜털 같은 부드러움으로 태어났다네
양 떼처럼 떼지어 다닐 때만 해도 참 순박했었지
널따란 하늘을 떠돌다 어느 순간
가슴속에 욕망의 그림자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네
그 빛깔은 점점 어두워지고
마침내 편을 갈라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지
욕망에 젖은 그들이
하늘을 몰려다니며 싸우기 시작했네
서로의 그림자를 짓밟으며 으르렁거리고
한 줄기 번개가 먼저 칼날을 번쩍 세웠네
순식간에 하늘이 갈라지고
우레가 온 세상을 뒤흔들었네
벼락은 분노의 창처럼 내리꽂히고
하늘은 전쟁터처럼 붉게 물들었네
그들은 서로 엉켜 찢기고, 불타고, 흩어졌네
전쟁이 끝나고 그 하늘을 뒤덮던 그들은
모두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네
비로소 하늘엔 다시 푸른 평화가 보드랍게 흐르고 있었네

♧ 가을에 – 성숙옥
바람이 나무의 색을 바꾼다
빨강 파랑 단풍의 잦은 떨림은
마음까지 물들인다
가을은 세상의 안부를 물으며 온다
하늘은 티 없고 길은 뭉개지는 시간
빛바랜 자리엔 이별이 스미고
시간이 마르며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모음에서 멈추기도 하고
꺽인 햇살에 야윈 그림자가 흩날린다
가을을 두르고 걷는 나무 사이
나는 저무는 바닥의 시간을 오래 바라보리라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서 다시 비워지는 것을

♧ 촛농 치료 – 유정남
오른쪽 주머니 찾는 손이
왼쪽 주머니에서 발견될 때, 바늘은 뭉치로 찾아온다
옹이 진 관절 아래
방향 잃은 열 개의 손가락
1초 담근 후 10초 말리세요
가장 먼저 불 켠 주방이 골목의 새벽을 채 썰면
금속성 초침은 몸속에서 돈다
정오의 아가리에서 넥타이들이 쏟아질 때
1초는 10초는 구분될 수 있을까
끓는 기름 혓바닥이 고무장갑을 물어뜯는데
불과 어울려 춤추는 당신
헝겊 인형처럼
표정이 없다
구름으로 쌓인 접시 앞에서
탕수육이 파삭, 웃을 때
손목을 빠져나온 새 한 마리 환기통을 빠져 나간다
새벽부터 들고 돈 시계가 굴러떨어진다
10초 담근 후 손을 꺼내 10초 말리세요
브레이크 타임에 내걸린 파라핀 장갑
주먹을 쥐자 허공이 찢어진다
퇴행의 뼈마다 퇴적암으로 쌓인
촛농이 강물로 흐른다
어둠의 얼굴을 할퀴고
끌어안고
삼키던
한 송이 촛불
파란 물속에 하얀 앞치마 꽃이 핀다

♧ 공기 뿌리 묻기 – 이령
어제는 엄마가 치매예방책을 사 왔는데 오늘 또 사 왔습니다
내가 물 준 화분에 엄마가 또 줘서 뿌리가 삭습니다
생이 영원하리란 믿음 때문입니다
허공이라도 움켜잡아야 했을 테지요
집을 두고 집에 간다던 엄마는 사방 헤맸을 테지요
데려다 준 젊은 순경은 지나치게 사무적입니다
현생은 후생의 전생
전생의 부모는 현생의 자식이라는데
익숙한 주문마저 시들해져 가지를 무지르다 울컥합니다
무성한 시간을 들추면
순 자리 비집고 울컥 기억이 옹이집니다
삭았다 거듭 돋는 슬픔입니다
시든 잎을 걷어 내면 새잎이 서둘러 나듯이
흙을 돋우고 햇살 고운 곳에서
엄마는 아기처럼 주무십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물보다 환기가 중요합니다
한 얘기 하고 또 할 때 점검하지 않았으니
잎사귀의 구멍 나듯 우리 사이가 휑한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 서둘러 공기 뿌리는 가슴에 묻어야 합니다
웃으면서 우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겨울의 암막을 걷어내고 초록이 번지는 건
울음의 수위로 웃음을 싹 틔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살아가고 살아지기 때문입니다

♧ 기명 – 손창기
저 빗물이 고여 있는 시간은 얼만큼 될까
흙길에 물이 고여 웅덩이가 생긴다
하늘의 명을 받아 그릇이 된다
곡기 끊은 개가 끝내 마시지 않은 그 물
나비가 날개 모아 마시고
찍어 머금는 새의 부리도 안으로 모은다
여름 복날, 스테인리스 옆에서
쇠사슬에 묶인 숨결이 딱딱하게 굳어가던 개,
옴폭 손바닥에 오므린 대로 물을 담으면
손은 그릇이 되곤 했다
훌쩍훌쩍 물을 핥다가 눈 감는 순간,
손금에 찍힌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잠깐 그릇이던 길, 이름 없는 웅덩이
햇살보단 바람에 이내 마르고
다시 흙과 먼지로 되돌아간다
손바닥도, 흙길도 빈 그릇이 된다
쌀 씻는 손길에 흘러내리는 노을빛
누군가의 입술에 닿는 순간만이라도
이름이 박히기를, 오목한 빗방울 하나에도
*월간 『우리詩』 2025년 11월호(통권 44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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