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1 : 비탈에 누인 몸에 꽃망울 터지는]
*대구시월항쟁 현장,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등
6․26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아 답사한 기록.
♧ ㄹㄹㄹㄹ – 김정숙
한 사람 꿇습니다 또 한 사람 꿇습니다
섬에서 뭍에서 밭두렁에서 마당에서
끌려온 사람 사람들 줄줄이 꿇습니다
총부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꺾을 수 있는 건 다 꺾어 보는 것뿐
리을이 줄줄 줄지어 셀 수 없이 리을리을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 광산
리을이 걸어서 수직굴 앞에 세워졌습니다
총탄에 휘갈겨진 리을이 무더기로 떨어졌습니다
초성으로 쓰기에 불온하다 했던가요
리을의 살붙이라고 리을은 또 리을이 되어
증인이 버젓한 역사 숨겨가며 살았습니다
자음 중에 리을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반듯하다가도 춤을 추듯 흐르는 강물이듯
한 획을 내지를 줄 아는 모자란 듯 갖춘마디
이제 와 리을이 밥 달랍니까 살려내랍니까
자모음 스물넉 자 제자리에서 평등하듯
리을은 리을 자리에 놓으시면 됩니다

♧ 라고요, 완연한 봄이라고요 – 김정숙
얼음 땡 얼음 땡 함께 외쳐 주세요
꽃이니 뿌리 줄기니 모른다는 초야의 숲
왕이메 오름 분지가 살얼음으로 빛나요
바람도 비켜 간다는 아늑한 이 터전에
이끼류 얻어 입으며 살아낸 역사 그저 믿고
서둘러 피운 들꽃이 한데 얼어 있어요
봄 온다!
뛰쳐나온 희망이 잘못이라니
내려앉은 서릿발이 무자비한 무자년 같아
봄바람 보내 주세요
분지형 달구벌에도

♧ 레테의 강 – 김연미
죽음의 무게가 만든 수직의 검은 갱도
촘촘하게 벽을 짚은 삶의 거미줄은
억울한 목숨 하나를 걸러 내지도 못하고
두고 온 슬픔들은 산의 심장을 조이다
잘려나간 혈관을 타고 뚝뚝 떨어지네
스스로 눈물이 되네 삭아 내린 살과 뼈
저승으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슬픔과 탄식과 분노 증오의 강을 넘어
짐승의 창자를 닮은 폐광 속을 걸어가고
이 강은 건널 수 없소 망각의 레테의 강
저승까지 안고 갈 기억들은 물 위에 떠
대원골 코발트 광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 람濫 - 김연미
말이 되지 못한 함성이 댐에 막혀 있었다
바람의 뼈를 닮은 나무들 산을 내려와
푸르게 몸을 뒤집고 침몰하는 가창골
막혀 있다는 것은 탑을 준비하는 것
시공간을 흔드는 이름의 질량들이
단단한 바닥이 되어 물의 몸집을 키우고
아홉 번 꺾인 마디에도 꽃 피우는 구절초처럼
가창댐 깊숙이 젖은 물의 심장을 파고들어
뼛조각 화석 하나를 건져 올리는 당신
범람을 꿈꾸는 것이 어디 강물뿐인가
제주 사월의 눈물과 대구 시월의 눈물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 대원골 배롱나무 – 김미향
백자산 지하 갱도에 잠이 드신 아버지
수십 번 봄이 오고 수백 번 찾아와도
서늘한 벼랑에 누워 깨어날 줄 모르네요
눈물인지 빗물인지 까닭 없이 차올라
비릿한 옷소매로 노여움 닦아보지만
방목의 불효막심은 지워지지 않네요
변명처럼 왁자한 봄나들이 길고 길어
비탈에 누인 몸에 꽃망울 터지는 소리
잠 깊은 당신의 가슴에 송이송이 달아드려요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돌돌돌 흘러온 시간』 (한그루,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의 시(2) (0) | 2025.12.14 |
|---|---|
|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2) (0) | 2025.12.13 |
|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의 시(2) (0) | 2025.12.11 |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4) (1) | 2025.12.10 |
| 강연익 시집 '노을을 붙잡고'의 시(5) (0) |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