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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돌돌돌 흘러온 시간'의 시(1)

by 김창집1 2025. 12. 12.

 

 

[특집 1 : 비탈에 누인 몸에 꽃망울 터지는]

*대구시월항쟁 현장,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등

6․26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아 답사한 기록.

 

♧ ㄹㄹㄹㄹ – 김정숙

 

한 사람 꿇습니다 또 한 사람 꿇습니다

섬에서 뭍에서 밭두렁에서 마당에서

끌려온 사람 사람들 줄줄이 꿇습니다

 

총부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꺾을 수 있는 건 다 꺾어 보는 것뿐

리을이 줄줄 줄지어 셀 수 없이 리을리을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 광산

리을이 걸어서 수직굴 앞에 세워졌습니다

총탄에 휘갈겨진 리을이 무더기로 떨어졌습니다

 

초성으로 쓰기에 불온하다 했던가요

리을의 살붙이라고 리을은 또 리을이 되어

증인이 버젓한 역사 숨겨가며 살았습니다

 

자음 중에 리을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반듯하다가도 춤을 추듯 흐르는 강물이듯

한 획을 내지를 줄 아는 모자란 듯 갖춘마디

 

이제 와 리을이 밥 달랍니까 살려내랍니까

자모음 스물넉 자 제자리에서 평등하듯

리을은 리을 자리에 놓으시면 됩니다

 

 



♧ 라고요, 완연한 봄이라고요 – 김정숙

 

얼음 땡 얼음 땡 함께 외쳐 주세요

 

꽃이니 뿌리 줄기니 모른다는 초야의 숲

 

왕이메 오름 분지가 살얼음으로 빛나요

 

바람도 비켜 간다는 아늑한 이 터전에

 

이끼류 얻어 입으며 살아낸 역사 그저 믿고

 

서둘러 피운 들꽃이 한데 얼어 있어요

 

봄 온다!

뛰쳐나온 희망이 잘못이라니

 

내려앉은 서릿발이 무자비한 무자년 같아

 

봄바람 보내 주세요

분지형 달구벌에도

 

 



♧ 레테의 강 – 김연미

 

죽음의 무게가 만든 수직의 검은 갱도

촘촘하게 벽을 짚은 삶의 거미줄은

억울한 목숨 하나를 걸러 내지도 못하고

 

두고 온 슬픔들은 산의 심장을 조이다

잘려나간 혈관을 타고 뚝뚝 떨어지네

스스로 눈물이 되네 삭아 내린 살과 뼈

 

저승으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슬픔과 탄식과 분노 증오의 강을 넘어

짐승의 창자를 닮은 폐광 속을 걸어가고

 

이 강은 건널 수 없소 망각의 레테의 강

저승까지 안고 갈 기억들은 물 위에 떠

대원골 코발트 광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 람濫 - 김연미

 

말이 되지 못한 함성이 댐에 막혀 있었다

바람의 뼈를 닮은 나무들 산을 내려와

푸르게 몸을 뒤집고 침몰하는 가창골

 

막혀 있다는 것은 탑을 준비하는 것

시공간을 흔드는 이름의 질량들이

단단한 바닥이 되어 물의 몸집을 키우고

 

아홉 번 꺾인 마디에도 꽃 피우는 구절초처럼

가창댐 깊숙이 젖은 물의 심장을 파고들어

뼛조각 화석 하나를 건져 올리는 당신

 

범람을 꿈꾸는 것이 어디 강물뿐인가

제주 사월의 눈물과 대구 시월의 눈물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 대원골 배롱나무 – 김미향

 

백자산 지하 갱도에 잠이 드신 아버지

수십 번 봄이 오고 수백 번 찾아와도

서늘한 벼랑에 누워 깨어날 줄 모르네요

 

눈물인지 빗물인지 까닭 없이 차올라

비릿한 옷소매로 노여움 닦아보지만

방목의 불효막심은 지워지지 않네요

 

변명처럼 왁자한 봄나들이 길고 길어

비탈에 누인 몸에 꽃망울 터지는 소리

잠 깊은 당신의 가슴에 송이송이 달아드려요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돌돌돌 흘러온 시간』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