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첩홍매萬疊紅梅
겨울 한파 지나
꽃망울을 터뜨린
만첩백매가 만 겹의 홍매가 될 때까지
산 넘고 강 건너
바다 끝까지
흐르고 흐르다가
너 하나
내 마음에 새기고 새기면서
둥근 달 하나
만리장성 위에 걸어 놓으마
사랑아
이승의 무량한 사랑아
울다 울다 목이 쉬어서
붉고 붉은 꽃으로 피어나거라!

♧ 불면증
수천 마리 흰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새도록 가고 있었다
수만 마리 꽃뱀이 꼬리에 꼬리를 잇고
날 새도록 가고 있었다
땅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내닫고 있었다
서둘러 저무는 동짓달 기나긴 밤
불면 날아가 버릴 가벼운 잠이여!

♧ 그리움
눈썹 끝
네 그림자
꿈에 어리어,
잠 깨어
잡으려니
날이 밝았네.

♧ 착각
나이 팔십이면
뭔가 보일 줄 알았다
나보다 더 사신 분께
뭐가 보이느냐 물었더니
눈이 점점 침침해지는데
무엇이 보이겠는가 하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은
나이 든 눈이 아니라
눈빛 맑은 어린 눈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눈이다
무지개가 피어도
나는 보지 못하는데
아이에게는 날마다 무지개가 뜬다.

♧ 난蘭의 기원
난은 하늘에 사는 새였거니
해오라비 갈매기 방울새 제비였거니
어쩌다 지상으로 추락했는가
하늘을 날다 지쳤는가
지상이 그리 그리웠는가
어찌 땅으로 내려왔는가
나무에 내려앉기도 하고
바위에 걸치기도 하고
땅으로 떨어지기도 했느니
날개는 꽃이 되고
발은 뿌리가 되고
몸은 잎이 되었느니
새들이 하늘에 쓴 시
땅에 내려
꽃이 되었다
난꽃은 새들이 쓴 시가 아닌가
새들이 추는 푸른 춤이 아닌가
새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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