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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2)

by 김창집1 2025. 12. 13.

 

 

 

♧ 두루말이 휴지

 

연필은 까만 심이 제 할 일을 하지만

휴지는 심만 남으면 버려진다

반찬은 반찬통에 있을 때

존재감이 있지만

휴지가 휴지통에 있을 땐

버려진다

할 일이 끝난 것이다

침은 입속에 있을 때는 나의 일부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진다

 

세상이 부를 때마다 조금씩

제 살을 떼내 더러운 세상 닦아주다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수명을 다하는

휴지 같은 사람들에게

누가 침을 뱉느냐

 

 



♧ 줄 1

 

동네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

반나절 기다리고

30분이면 먹고 돌아간다

한 끼 먹고 돌아가면 하루가 저문다

 

공원에 줄이 길다

무료 배식한다고 아침부터 줄을 섰다

반나절 기다리고

짧은 한 끼를 먹고 나면

다시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맛도 모르고

배곯지 않으려 먹은 한 끼

소화돼 버릴까 봐 일찍 잠자리에 든다

 

 



♧ 줄 2

 

오픈런이라는 뱀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다가가

선악과를 가리키며

아담과 같이 얼른 먹어

유혹하는 뱀이 있다

빨리 서둘러야 해

늦으면 없어

조곤조곤 유혹하는 뱀이 있다

처음엔 아주 작았지만

유혹은 점점 몸뚱이를 불리고

꼬리에 꼬리를 이어

어느새 에덴동산의 고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꼬리가 되어

머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 데칼코마니

 

쌩쌩 지들이 달린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빨간색 숫지들

최고속도 80, 90

가끔은 30, 50

모두들 달린다

최고속도가 아니 라

최저속도로

가끔은 훌쩍 건너뛰어

자동차 계기판이 맞게 작동하는지

시험한다 200, 혹은 250

 

오늘도 재건축 아파트 현장으로 달려간다

집에서 곤히 자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지친 다리 무거운 어깨도

하늘 한번 쳐다보고 힘을 낸다

국회에서 설왕설래하고

각종 언론에서 적정하다 아니다

말이 많은 최저임금

더 준다고 딱지 끊는 것도 아닌데

딱 그만큼이다

자기들은 한 달 밥값, 자녀 용돈으로

턱도 없는 액수라고 하면서

더는 못 준다 딱 금을 긋는 최저 임금

 

 



♧ 내가 좋아하는 화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 망치질합니다

 

하얀 도화지 대신 광목천을 사고

물감 대신 페인트를 사고

미전에는 한 번도 내보지 못한

걸개그림만 그려서 광장에 내걸다가

그의 꿈인지 부모님의 꿈인지 모를

교사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건설 노동의 현장에서 세상을 조각하는

내가 좋아하는 미술학도였던 형

 

붓을 던지고 망치를 들고

도화지에 그리는 집 대신

하늘에 커다란 집을 그립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페인트를 풀어

파랗게 칠하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양동림 시집 『거울형 이성질체』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