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픔 사용법
거늘이 왕상한 집 벽장 속에 숨는 아이
누워서 천장을 보면 굼벵이가 꿈틀거리고
앉아서 벽창호를 보면 쥐 오줌이 어른대고
친구들이 주산학원을 몰래 다닌다는데,
소풍 날 재 묻은 갈치 대가리는 아니잖아?
생각에 딱지를 접어 자치기를 하고 싶어
보이는 숫자끼리 박치기를 하는 거야
미운 사람의 머리를 치는 일은 흥미진진해
함부로 들었다 놨다, 거슬리고 하찮아
하필이면 조합장 딸 미옥이네가 전화를 놨대
뒷번호가 삼팔공공 어라, 우습지 않아?
이럴 때 필요한 거야 빵야 빵야 빵야 빵야
글자를 뒤집어 봐 야빵 야빵 야빵 약방…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하기를 좋아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
지금 아프단 말야

♧ 십오 세
라디오만 있고
수유리가 궁금했던
성우의 목소리에
젖멍울이 붉었던
일요일은
서울에만 있는

♧ 흐린 날의 춤
잠이 안 오네 양은 냄비에 끓고 있는,
잠이 안 오면 양을 세라는 말은 왠지 불경스러워 습기 머금은 팔월, 산을 넘지 못하는 비, 부정적인 아이라 불리기를 원치 않아 차라리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해서 긍정이 되기를 바란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미술의 끝은 장미꽃이 새가 되는 거지 아니면 그 반대여도 괜찮아 이런 말을 하면 한두 명씩은 꼭 비아냥, 마녀를 쳐다보는 눈빛이지 빗방울 위에 올라탄 마녀, 빗자루 아니고 빗방울, 빗방울은 힘이 세 꽃도, 차도, 산도 다 들어 올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나이지만 가뭇없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시험 볼 때마다 혓바늘을 낫게 한 건 입안에 든 침이니까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침을 맞아본 적 있어 병색이 짙다고 하더군 집안에 마가 낀 거래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는 것을 누가 자꾸만 하고 있대 그게 난데 어떡하지? 장마가 걷히질 않네? 안개가 막다른 길로 인도하려고 해 이럴 땐 기운을 바꿔 야 한대 환기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조금 빠른 음악을 듣는 게 좋겠어 아버지, 술김에 할부로 들인 전축 발밑에 모셔 두었네 하지 말라는 것만 하는 나, 교 회 선생님이 불경스럽다고 버린다는 LP판 내가 받아 왔어 그러니까 내가 자꾸 불경 불경하는 거야 그거 알아? 바늘이 회전반에 올려질 때의 스릴, 치, 치직, 그으윽, 아 그윽하다 그윽해 Bee Gees Stayin' Alive 소리 질러, 아아아아 살아 있다고 아아아아 살아 숨 쉰다구, 살아남았다고, 좀 더 볼륨을 높여 그리고 춤, 춤은 리듬이 중요해 찌르고 박고 찌르고 박고 이제 물결을 타는 거야 흘러갔다 밀려오고 다시, 흘러갔다 밀려오는 이런, 불경스러운
열아홉,
뿌리 없는 나무
어쩌다 핀 꽃 같은

♧ 첫, 꿈
삼일교회 풍금 소리는
서울 말씨의 바람 같은
손이 흰 사내아이의
조신한 발자국 같은
꼭 한 번 비밀의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조금 기우뚱,
초이레 달을 닮은 말더듬이
하루에 밥상 두 번 엎는
지독한 수모에
자꾸만 목이 말라서
밤이슬에 꿈을 적셨다

♧ 신촌 옛집
서울살이 1년 만에 돌아왔더니 집이 사라졌다
어머니 혼자 등짐 지고 통물을 건넜다는
소문만 무성한 집 통시 옆 비파나무는
노란 꽃을 송이송이 달고
댓돌 위에 놓인 편지에 귀를 대고 있었다
영등막 아래 굴렁집
전화가 없어서 누군가의 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운 집을 떠나 슬픔의 집으로 걸어가는데
전봇대에 기대어 기웃기웃 저물어가는
익숙한 그림자
아버지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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