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된 그림
좁은 골목 본전다방은 반시계 방향이다
근엄했던 아버지 입가 미소 번지던 곳
퇴근길 덧댄 시간이 그림자도 감추던
돌부처 무릎 위로 미니스커트 발칙하다
사르르 설탕 녹듯 욕망도 고독도 벗어든 채
귀 걸린 웃음소리가 겸연쩍게 퍼졌지
주고받던 무게만큼 본전은 찾았을까
호기로운 레자 지갑 잔돈 몇 푼 공허했을,
남겨 온 에스프레소 본전 생각 나던 날

♧ 두 가시
대못에 찔리면서
정이 든다 생각했지
감쪽같은 짜깁기에
또 한 번 속아줬지
펑크 난 타이어마냥
줄행랑도 못 치면서
---
*두 가시 : 제주어로 '부부를 뜻함.

♧ 송냉이골 사람들
저 멀리 깜박이는
삼등성 별님들아
배롱꽃 이불 삼아
여태 꿈을 꾸는가
봉긋이
달이 오르네
피식 한번 웃어봐!

♧ 계요등꽃 붉어요
'마지막 벌초우다'
촌수 모른 호미질이
정인의 손길 닮아
손 내밀면 안 놓을 듯
봉긋한 실루엣 하나
햇살 슬쩍 비춰요
한 시절 구전으로 남아
내력을 이어오던,
시류 따라 옮겨야 할
그 짐작은 하는지
그녀의 외딴집 뒤로
계요등꽃 붉어요

♧ 담쟁이 구술 생애사
평화시장 가는 길목, 신의 손짓 닮았더라
시련 속에 한데 뭉치던 반세기 전 평화 이야기 날줄 세우는 담쟁이처럼 목 힘줄이 불거진다 손 찔리고 잘리면서 붉은 꽃수 놓았지 한 땀 한 땀 박음질마다 밥알들 줄지었지 가난은 열다섯 살 가장을 동정하지 않더라 창이라도 있었다면 훨훨 날아갔겠지 끊기지 않는 화학사처럼 시간은 길고 길었지 쪽잠에 단꿈이 깨져도 아쉬움은 없더라 기쁨과 슬픔, 소박한 꿈도 나눠가며 그때도 지금처럼 실핏줄 터지던 밤 평등은, 공정한 세상은 감언이설에 묻히더라 불행도 행복도 시절 인연, 그게 내 몫이더라
당숙모 눈물샘이 터진다 핑그르르 핑그르
그래도 늘 희망은 있지, 빈손 들고 또 드네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 (목언예원,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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