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루 아워 – 이상연
우리 산책할까요
머리로는, 단둘이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입은, 그럴까요
산책로를 걷는데 손을 내밀어요
머리로는, 손을 잡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손은, 이미 그의 손에 포개 있어요
어둠과 밝음이 뒤섞이는
두려움과 설렘이 겹치는
한순간의 문턱
파란빛의 산란은
태양의 숨결을 알아챈 듯
주섬주섬 검은 꼬리를 거뒀어요
나를 바라보는 눈을 피하지 않겠어요
파랗고 깊은 색으로 물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우리에게 있을 거니까요
콩깍지가 제대로 씌였어요

♧ 심연 – 이상욱
어둠이 더디게 흘러가던 밤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하늘은 조용히 숨을 고르다
편지 같은 별들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누군가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기도
나는 가만히 두 손을 펼쳐
별빛 한 줌을 품속에 안았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밤 같은 가슴 속에 묵혀야
침묵이 된다
잊힌 꿈의 텃밭에
심어 두는 것이다
달이 지붕 위에 반쯤 걸치고,
별들이 더욱 선명해지면
오래된 눈물 한 줌을 캐내어
하늘 깊숙이
흘려보낸다

♧ 굿바이 풋사랑 - 이수미
은은한 조명 아래 맑은 와인 잔 부딪치며 붉은 기운 스며든 촉촉한 눈망울
즉석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 실어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하룻밤을
부딪쳐서 깨어지는 바다 물거품 속에 우리들의 흔적 흘려보내고 왔건만
포장마차 빈 술잔은 채곡채곡 쌓여만 가고 해비치 해변의 물거품은 여전히 맴돌고

♧ 이누이트 – 이중동
머그컵이 책상 위에서 말라가고
키보드에 묻은 손때가 옅어진다
낚시 구멍을 바라보듯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 쉬던 온기가 벽을 타고 사라진다
동료들의 발걸음이 복도에서 멀어지고
구두 소리는 얼음 위를 걷는 듯 서늘하다
조직 개편의 회오리 속 지난겨울,
그는 유빙처럼 떠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빈 의자 그림자 고래만큼 길어진다
모니터는 오로라처럼 발광하고
읽지 않은 메일이 눈처럼 쌓인다
밤이면 털모자를 눌러쓰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뒷모습
지금쯤 그는 어느 빙원 위에서
먹잇감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새벽까지 켜진 가로등이
등대처럼 사무실을 비추고
주인을 잃은 빈자리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유리창 너머 북풍이 몰아치고
떠도는 바람만이 그의 안부를 묻고 있다

♧ 10년이 지난 후 – 이학균
한 뼘도 안되는 거리
10년의 시간
출발점은 희미해졌지만
걸어온 길은 깨끗한 창문 너머
고요한 풍경으로 누워 있다
멀어진 것들은 가볍고 아름답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소중한 만큼의 무게로 아름다운 것을 덮는다
깨어지고 부서졌던 아픔들은
깊은 상처가 되어 흔적을 남겼으나
세월의 굳은살 아래 뭉툭해지고
아프지 않게 지나온
그럭저럭 지나온 무미한 시간들이
돌아보니 오히려 꽃이 되고 길이 되었다
사는 일과 살아 내는 일이
소실점이 되어 하나로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아픔은 그 이상의 삶이 된다

♧ 새빨간 루즈 – 이화인
시골 읍내 버스정류장 화장실
때가 덕지덕지 묻은 깨진 거울 앞에서
여중생 세 명이 시끌벅적하다
뚱보가 암탉 똥꼬처럼 오므린 입술에
감춰 온 루주를 바르자
껑청 다리가 재빠르게 낚아채 봄바람처럼
나불나불 나불댈 얄따란 입술에 바르고
짜리몽땅 선머스마가 거위 목에 입술을 내민다
뽀얗게 분칠한 얼굴마다 새빨간 꽃이 피었다
셋이 거울에 입술을 쪼옥 찍어 누르자
붉은 장미꽃 세 송이가 피었다
- 저 가시나들 남우세스럽게 입 바닥 좀 보랑께
걸쩍지근하게 오줌을 누고 나오던 안골 댁이
허리춤 골마리 추겨 새우며 내뱉는다
- 쥐새끼 잡어묵은 것처럼 시뻘경께 오사 허갓시라 잉
학생들은 버스정류장이 떠나가도록 즐겁고
기가 동동한 날빛 하늘에 생뚱맞은 낮달처럼
갈 길이 바쁜 안골 댁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 일흔에 쓰는 자서전 – 장문석
남자로 태어났다
알랭 드롱 정도의 미남은 아니어도
연애할 때 퇴짜는 맞지 않았다
키도 훤칠하지 않았다
탓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버스 손잡이만 잡을 수 있으면 되었지,
마음 편하게 살았다
두되 또한 월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둔한 둔재는 아니었다
남들만큼은 배우고 익혔다
직업? 이것만큼은 자부심이 있다
평생 아이들과 가르침을 주고받았다
행복한 천직이었다
녹봉 또한 가족을 건사할 만했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글쓰기를 좋아했다
멋진 시인이 되리라, 꿈은 컸으나
깜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시집 몇 권 상재한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자랑스러웠다
펼쳐 보면
서툴게 피었다 진 라일락과 반짝이는 사금파리
찢어진 돛폭과 그 옆의 나침반
여전히 별과 바람을 부르는,
시집 한두 권이 더 나올지도 모르겠다
밀밭 여행을 즐겼다
나이테에서 누룩 내를 맡고 가는 이 많으니
언감생심, 백수는 꿈도 꾸지 않거니와
그래도 일흔이면 딱히 단명은 아닌 듯하여
오늘도 술잔 위에
늦가을 볕 한 줌 올려 보는 것이다

♧ 혼불 – 정지원
어둠 속 잠든 땅
피어나는 작은 씨앗
그 불꽃은 희망의 노래
저 밤길 밝혀 나아가네
세월 속 꺼지지 않은 불씨
바람 불어와도
타는 빛
꿈과 마음 모여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
그 따뜻한 빛으로
세상 가득 심는
사랑과 용기

♧ 교차로 – 최경은
무한대로 내려온 빛도 멈춰서서 기다릴 것 같다
신호가 바뀌자 발걸음이 횡단보도로 뛰어든다
서로의 얼굴들이 엇갈린다
급브레이크 밟은 차량이 멈춰 선다
각자의 속도에
각자의 방향으로
접힌 발걸음이 휘어진다
직선과 직선이 만나 십자가를 그려 놓았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이
한 말씀 한 말씀이다
노란 불이 깜박인다
멈출까 지나갈까 망설이는데
신호등이 바뀌고 순식간에 고립된다
죄지은 사람이 달아나듯
손을 들고 인사를 하며 나머지 횡단보도를 걷는다
가로수 벚꽃들은 느긋하게 피고 지는데...
도시는 왜 속도가 지배하는 걸까
감정조절이 사라진 마음 한구석
내 감정의 교차점은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밀고 끌어당기는 기울어진 모서리
무수한 마음의 결들이 교차한다
보이는 교차로 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교차로를 더 많이 만난다
*월간 『우리詩』 2025년 11월호(통권 제449호)에서
*사진 : 지중해 바닷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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