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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1)

by 김창집1 2025. 12. 21.

 

♧ 사랑이 문 앞을 지나갔네 – 김정옥

 

사랑이 문 앞을 지나갔네

그 사랑이 문 앞을 지나갔네

나는 몰랐네

그때는 몰랐네

사랑이란 걸 몰랐네

 

사랑이 문 앞을 지나갔네

강물처럼 지나갔네

바람처럼 지나갔네

 

사랑이 문 앞을 지나갔네

영원 속으로 묻혔네

 

그 사랑이 지나갔네

 

저녁밥을 짓다

그 사랑이 보름달처럼 떠오르네

 

 



♧ 꿀벌 – 김기호

 

두 팔을 날개처럼 흔들며

나는 듯이 바삐 사는

순대 국밥집 여주인

조석으로 문전성시다

사람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시장통은 향기가 가득하다

카드 단말기도 날갯소리를 내며

가득 찬 풍요를 밀방蜜房으로 옮긴다

건물주가 평생소원이라며

저리 바쁘게 꽃밭을 날아다닌다

 

 



♧ 지는 것도 피는 일 – 김선순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피겠다고 피워 보겠다고

봄이 떠미는 등살에

나는 꽃으로 피어났다

 

햇살에게 속살 같은 꽃잎을 열었고

바람에게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눈길 하나 없이도

스스로 만개하는 법을

이름이 잊히기 전에

조용히 스러지는 법을 배웠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숱한 해를 견디고서

나는 봄의 걸작으로 살았다

 

화분에서 시들어 거둬 낸 꽃들

그 잔향은 흙으로 스며들어

말없이 어둠을 견뎌냈다

 

봄이 문을 열자마자

져 버린 수국이 분꽃이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올랐다

 

지는 것이 피는 일이라는 것을

시든 꽃잎 사이 남은 향기로

생존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누구도 모르게 스러지는

온 생이 펼치는 축제

 

지는 것도 다시 피는 일이다

 

 



♧ 어느 백세 치매 노인의 사랑 일기 – 김세형

 

사람들은 날 뇌 해마 신경세포가 거의 죽은

듣지도 말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 구실 끝난

중증 치매 노인이라고 하지만, 난 아직도 팔십여 년 전의

나의 첫사랑을 생생히 기억한다. 낭랑 십팔 세 풀꽃 향내 나는

소녀의 길게 늘어진 삼단같이 빛나는 검은 머리채,

새벽이슬 머금은 앵두같이 뾰족이 솟은 빨간 입술,

상앗빛으로 빛나는 탄력 있는 살과 삼백육십오 가는 뼈마디들이

서로 몸을 가볍게 부딪치며 오케스트라처럼 소리를 내는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 아- 사람들은 날

아무것도 표현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살아 있는 시체 취급하며

반말조로 요람 속 갓난쟁이 똥기저귀 취급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그날 밤의 풀꽃 향내 나는 소녀의 체취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잊을 수 없는 소녀의 향내가

언젠가 내 무덤가에 향긋한 풀꽃들로 영생토록

싱싱하게 피어 있을 거라 믿는다.

뇌가 커서 슬픈 짐승,

21세기 호모사피엔스들이여!

기억하라 온 마음과 온몸과 온 뼈로-

평생 살아 있었던 순간은

사랑했던 그 순간뿐이었다는 것을!

 

 



♧ 햇살 헤는 아이 – 김은옥

 

아침 햇살 비추자 먼지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당신은 어느 광년에서 오셨는가요

오늘도 눈에

두 눈 속에 스칩니다

 

당신도 나도 이 우주에서는 순례자일 뿐

당신의 아이인 나는 어쩔 수 없는 광합성의 순례자 당신의 부속물

당신 품속에서 늘 새롭게 태어나지요

나는 당신에게서만 자라납니다

 

오늘도 햇살이 눈에 스칩니다

갓 태어난 아이 하나 눈 속에서 빛납니다

 

 

                           *월간 『우리詩』 2025년 12월호(통권 450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