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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1)

by 김창집1 2025. 12. 20.

 

 

시인의 말

 

 

그늘에 잠긴 이름들도

어느새 표정이 되었다

 

겨우, 나를 빠져나왔다

 

안녕이라는 말,

저 먼 어디로 스며들었을까

 

섬이

조금 넓어졌다

 

 

                                             2025년 가을

                                                      홍경희

 

 



돌탑

 

 

돌 하나 들어 올려

귀를 씻고

입을 닦아

말의 무게를 고요히 다져

 

사람과 부처 사이에

올려 두네

 

사람 속에도 돌이 있어

거칠고 차가워도

서로 받쳐 주면

모난 틈에도 빛이 스며드네

 

돌 속에도 부처가 있다 하나

층층 돌탑이 쌓이고 늘어 갈수록

사람들을 닮아 가네

 

사는 일,

이미 수행이었네

두 손 모아

결국 사람을 받드는 일이었네

 

 



달아 놀자

 

 

살기 위해 남긴 손목의 흉터 위에

달맞이꽃을 피운 그녀

 

손 내밀 사람 없어도

비 내리는 날에도

속병 든 그믐에도

 

달아 놀자,

부르는 이들에게

불을 밝히는 지상의 한 모퉁이

허름한 술집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떠돌이별들까지 품었다

 

남을 위해 흘린 눈물이

부족한 별빛을 채우고

둥글게 모인 가락은

사막을 건너기도 했다

 

울컥이는 된소리들이

탁자 위로 엎질러지면

별똥별이 떨어지기도 했지

 

달아 놀자,

 

탁자 모서리가 다 닳았지만

깨고 나면 서로에게 닿지 못했고

어제는 뿌리를 내릴 만큼 깊지 않았다

 

얼룩진 밤을 지켜 냈으나

단 한 사람의 곁도 구하지 못한 채

 

달아 놀자,

 

그녀가 삐걱거렸네

먹구름에 걸려 달이 넘어가는 날이 늘어 갔네

 

뒤돌아보지 않으면

상처의 이름도 알 수 없으니

 

너였거나 나였거나, 너무 멀어서

술 취한 새벽처럼

그녀는 궤도를 벗어나 떠나 버렸지

 

달을 밀어내고 나설 때

비로소 달과 가장 가까워졌지

 

 



저녁의 눈빛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훔치고 싶어 하는 한 사내가 있다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해

곁눈질로도 아버지를 배워 본 적 없는 그는

무릎이 높아 갈수록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들키지 않으려

그늘을 만들지 않았다

눈빛을 숨겼다

 

어느덧 아들의 아버지라는

부풀어 오른 호칭이 생겨난 이후에도

 

바늘처럼 마음속에 박한 아버지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아들 노릇과

아비 노릇을

그의 어깨 위에 묵직하게 내려 앉혔다

 

오늘도 술자리에서

투병 중인 친구의 아버지를 챙기고

후배들의 기억에서 놓쳐 버린 젊은 아버지를

자꾸 묻는다

 

세상의 아버지를 잠시 빌려

마음 저편 아버지를 불러 보는

그의 방식이다

 

세상의 아버지를 모두 훔쳐서라도

아들을 채워 주고 싶은

그 사내의 몸짓이다

 

그럼에도 불이 켜지지 않는

빈집 같은 아버지

 

반쯤 태운 담배 연기 속에 숨긴 채

살아가는 그는

 

길어진 그림자 속에서도

여전히 아버지를 배운다

 

 

 

 

뿔 속의 울음

 

 

울음에 닿지 못해

오름 능선을 천천히 걸었다

 

나무이기도, 새 발가락 같기도

창끝 같기도 한 주술적 부호

 

,

그 모양이 오름과 겹쳐 떠올랐다

 

대지가 오름들을 품는 것도

오름이 가파른 까닭도

뿔 속에 담긴 외로움 때문인 것 같았다

 

그저 오르고 또 오를 뿐

곶자왈 숲을 지나 오름 정상에 다다라

억새밭 속,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억새를 흔들고 지나가자

비로소 주먹을 풀었다

 

눈앞의 한라산 위 구름도 흘러갔고

멀리 지는 해를 등진 섬마저

수평선에서 사라졌다

 

바람이 불고 외로울 때면

멀리 있는 사람부터 찾듯

 

빈 둥지 앞에서 돌아오지 않은 새를 기다렸다

새집이 잔잔히 흔들렸다

 

기도는 하지 않고

울음이 따라붙은 말만 믿기로 했다

 

눈물은 고이지 않고

안개가 되어 땅과 하늘 사이를 흘러갔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