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흐린 날
한낮인데
어스름하다
온갖 상념 몰려와도
소중한 것 하나 잃어버린 듯한 느낌
허전하고 외롭다
해를 가렸던 검은 구름
잠깐 가슴을 열었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나를 붙잡는 내 그림자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다

♧ 동반자
오늘도
눈 뜨이니
날 떠밀며
일으키네
이리 기웃
서리 기웃
세상과 눈 맞추게 하네
언젠가
함께할 긴 잠을
등에 진
내 그림자

♧ 모르는 사이
내 그림자는
나에게 할 말이 없다
내가 무엇을 물으면
같은 말 되물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나도 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림자도 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서로가
잘 모르는 사이다

♧ 오늘은 침묵
오늘은 약속 없어 정처 없을 날
어둑한 골목에서는 맥을 못 추는
내 인생의 공범 내 그림자
내리 사흘 술에 지친 모양이다
해 질 녘 하늘은 맑은데
길고 걸쭉해진 내 그림자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은 날씨도 춥고
세상도 어수선하니 집콕 합시다
내 그림자도 나이가 들어간다

♧ 내 그림자는 내 빛
내 그림자는
문득문득 솟구치는 생각을 좇아
쏘다니기를 좋아한다
가끔
보이는 꽃과 함께 피고 지기도 한다
내 그림자는
탑동 파도 소리와 친하고
한라산에 잠시 앉은 구름을 반기며
밤하늘 적막 소리와 대화를 좋아한다
나와 똑같이 술잔을 들면서도
내 그림자는
어둠과 밤안개 새벽이슬 속에서
나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운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
무작정 나를 좋아한다는 것
내 그림자는 나의 희망이며 빛이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사진 : 영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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