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의 말
첫눈이 지나고도
한참을 아팠다
눈 내려 그런 줄 알았다
아프다 말하지 못했다
세상이
더 아팠으므로
올리브 묘목 한 그루 작은 화분에 심었다
내게도 꿈이 생겼다
2025년 가을
김진숙

♧ 당신의 밤은 어때요
택배 상자를 열자
쏟아지는 사유의 밤
잘 여문 밤톨 하나 손에 쥐고 만져 본다
고맙고 단단한 질문
당신의 밤은 어때요
키보드 자판들이
어둠을 다듬는 동안
밤의 가장자리에 웅크린 당신과 나
아팠어, 말하지 않아도
먹먹한 밤이 고이고
지난 계절 나의 뜨락은
생밤 같은 달의 나라
겹겹이 포개 두었던 불면을 다독이며
이제는 아프지 말자
또르르 굴러간다

♧ 안녕, 나야
그냥, 이라는 말을 ‘아프다’로 듣는다
그럭저럭 지낸다는 ‘외롭다’로 받아 적는다
새벽은 궁리가 많아
의역을 자주 한다

♧ 못의 기분
옛 교실 나무 바닥은 온통 못투성이야
꿈에서 깰 때마다 발바닥이 축축해
마음도 헐거워지면
자주 피를 흘리는 법
서랍을 열어 보면 누군가 뒤돌아보고
헝클어진 낙서장에 녹슨 문장 한줄
무심코 찔리곤 하지
깊게 박한 그 겨울
모처럼 못처럼 비 오는 그런 날이면
하늘 항해 바로 선다는 못의 기분까지
맥락도 검정도 없이
밤 편지를 쓰는 나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눈동자를 보세요
언제든 뽑아 쓸 눈물쯤으로 생각하지만
세차게 내리칠수록
완결되는 당신 같아

♧ 아직 처마 밑이다
신발 끈이 풀린 채 타닥타닥 오는 비
양철 지붕 그 아래 낡아 가는 골목에선
누군가 놓친 사랑도 자주 비를 맞는다
혀뿌리에 눌러앉아 잘 떼어지지 않던 말
미안해, 그 흔한 말도 모퉁이 돌아 나가
지금 막 뛰어내린 나는, 아직 처마 밑이다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산책』 (걷는사람, 2025)
*사진 : 물꿩 꺼벙이(살아있는 지구 - '민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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