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똥배 – 송준규
한번 나오면 들어가지 않는 골치 아픈
많이 먹고 안 움직이면 무조건 나오는
나오긴 쉬우나 들이밀어도 안 들어가는
배고팠던 시절엔 인격이라 불렸던
스타일 다 구기는
만병의 근원이 된다는
평생 경멸하며 친하고 싶지 않은
이별하고 싶은 그 놈
이도 저도 아니면 같이 갈 수밖에 없는
한 아름 안고 가리라 내가 쌓은 업이니

♧ 시의 맛 - 여연
새벽 레몬이 창을 쥐어짜고 혀끝에서 탁함이 떨어진다
씨앗 같은 구절이 튀어 첫걸음이 유리처럼 맑다
혀에 불씨 하나 내려앉아 단어의 껍질이 튀겨지면
매움이 판단을 벗겨 내고 의미는 핏줄로 질주한다
낮은 불에서 오래 고니 말의 뼈에서 육수가 우러난다
설명을 덜어 낼수록 존재의 윤기가 살아나고
덜 익은 생각을 베어 물면 초록의 마찰이 혀에 선다
정확한 한 꼬집의 염도, 문장의 피를 돌게 하고
아무 맛도 아닌 물 한 모금, 혀를 제자리로 돌린다
접시 바닥의 조용한 윤기, 침묵의 테두리를 닦는다

♧ 시인 – 위인환
내면을 열고 나와
득도한 작은 부처
영혼까지 맑아서
꽃을 피우는
더 낮은 곳으로
오랜 수행의 세월
참선을 설파하는
구도자

♧ 아스팔트 길을 가는 개미 – 이기헌
개미가 아스팔트 길을 간다
끝없이 펼쳐진 고단한 길을
개미 혼자 외롭게 걸어간다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것일까
내 삶의 길에서 만난 방랑자,
가려는 곳은 정해져 있는지
묵묵히 걷고 있는 그를 내려다본다
이리로 가거라 저리로 가거라
마음속으로 그에게 외쳐 본다
순간의 안위를 얻기 위해서
잘못된 길로는 가지 말아라
설령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아라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으니
뒤는 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하루가 저무는 아스팔트 길에서
홀로 걸어가는 개미를 내려다본다

♧ 한 줄기 빛 – 권순자
어둠 속을 헤엄쳐 오네
불안을 흔들어 쫓아 버리네
이 빛은 어디서 오나
너의 잔잔한 눈빛으로부터
너의 따뜻한 한마디로부터
뭉게구름처럼 퍼져나가는 빛
내 몸 속을 휘돌아 먹구름 걷어 내는 소소한 회오리
걱정덩어리를 가만히 해체하는
작지만 강렬한 힘을
너는 뿜어내는구나
나의 고운 천사
너로부터 오는구나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450호)에서
*사진 : 한라산 1100도로에 핀 상고대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섬 제주어 시집 '오막오막'의 시(4) (1) | 2026.01.02 |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 2026.01.01 |
| 김항신 제주어 시집 '꼿봉오지 베려보라'의 시(5) (1) | 2025.12.30 |
| 고성기 시집 '섬은 보고 싶을 때 더 짜다'의 시(5) (0) | 2025.12.29 |
|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의 시(14) (0) | 202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