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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3)

by 김창집1 2026. 1. 6.

 

♧ 유리창

 

당신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유리창이

점점 흐릿해집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더더욱 흐릿해집니다

당신이 창문을 열고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머잖아 안에 있는 당신은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창 하나 사이

당신과 나의 온도 차입니다

 

 

 

♧ 당신은 물이다

 

당신의 처음을 알지 못한다

공중에 부유하는 존재들을 모두 끌어안고

맨얼굴로 낙하하는 간헐적 반성이었다가

오랜 기도에 지쳐

온몸으로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나는 항거抗拒였다가

딱딱하고 거대하게 흐르다 서서히 녹아가는

맥 풀린 시대정신이었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가지 위에 살포시 무게를 더하는

차가운 솜털이 있다가

땅 위를 구르는 거친 손등이 말끔히 씻기는

해 떨어진 저녁이었다가

반드시 돌아오리라, 잊지 말고 기다리라 해놓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어린 군인의 약속

그 군인의 어미이다가, 애인이다가

거대한 발전기를 돌려 도시를 깨우는 빛이 있다가

 

 



♧ 물수제비

 

다시 찾은 신혼여행지 아우라지 강물에

조약돌을 힘차게 던져봅니다

모나지 않은 조각을 찾아

되도록 깊어 보이는 물 위로 있는 힘껏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 흘러가듯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 여태껏 잘 흘러왔으니

앞으로도 같이 어우러져 흘러가라고

힘차게 흐르는 물살 위로 우리 이야기를 던져놓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나듯

나의 물수제비도 물이 깊을수록 더 좋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나의 잠도 깊게 스며들면

새근거리는 숨소리 따라

가끔은 드르렁거리는 콧소리 따라

꿈결 같은 이야기들이 스치듯 흘러갑니다

아우라지는 오늘도 여전히 흐르고

내가 던진 물수제비는 강물 위를 뛰어다닙니다

 

 

 

♧ 혀 1

 

맛을 느끼 면서

혀는 점점 줄어들었다

어디를 가도 혀 짧다는 소리를 듣는다

맛을 느끼면서

배는 제 기능을 상실한다

배부르다 배고프다

본연의 감각은 사라지고

뱃살이 나왔는지

근육이 붙었는지가 관건이다

맛을 느끼면서

혀는 짧아지고

배고픈 삶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지고

맛을 따라 탐욕이 늘고

세 치 혀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 혀 2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나?"

혀입니다"

“그럼 가장 하찮은 것은 무엇이나"

”혀입니다"

독사는 빗물을 받아먹고 독을 만들고

나무들은 빗물로 맛있는 과일을 만드는 법

 

당신이 감미롭게 뱉는 말도

돌고 돌아

혀들이 얽기고설키면

험악한 독설이 될 수 있는 법

 

당신의 혀는 얼마나 고귀한가?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