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리창
당신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유리창이
점점 흐릿해집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더더욱 흐릿해집니다
당신이 창문을 열고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머잖아 안에 있는 당신은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창 하나 사이
당신과 나의 온도 차입니다

♧ 당신은 물이다
당신의 처음을 알지 못한다
공중에 부유하는 존재들을 모두 끌어안고
맨얼굴로 낙하하는 간헐적 반성이었다가
오랜 기도에 지쳐
온몸으로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나는 항거抗拒였다가
딱딱하고 거대하게 흐르다 서서히 녹아가는
맥 풀린 시대정신이었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가지 위에 살포시 무게를 더하는
차가운 솜털이 있다가
땅 위를 구르는 거친 손등이 말끔히 씻기는
해 떨어진 저녁이었다가
반드시 돌아오리라, 잊지 말고 기다리라 해놓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어린 군인의 약속
그 군인의 어미이다가, 애인이다가
거대한 발전기를 돌려 도시를 깨우는 빛이 있다가

♧ 물수제비
다시 찾은 신혼여행지 아우라지 강물에
조약돌을 힘차게 던져봅니다
모나지 않은 조각을 찾아
되도록 깊어 보이는 물 위로 있는 힘껏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 흘러가듯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 여태껏 잘 흘러왔으니
앞으로도 같이 어우러져 흘러가라고
힘차게 흐르는 물살 위로 우리 이야기를 던져놓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나듯
나의 물수제비도 물이 깊을수록 더 좋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나의 잠도 깊게 스며들면
새근거리는 숨소리 따라
가끔은 드르렁거리는 콧소리 따라
꿈결 같은 이야기들이 스치듯 흘러갑니다
아우라지는 오늘도 여전히 흐르고
내가 던진 물수제비는 강물 위를 뛰어다닙니다

♧ 혀 1
맛을 느끼 면서
혀는 점점 줄어들었다
어디를 가도 혀 짧다는 소리를 듣는다
맛을 느끼면서
배는 제 기능을 상실한다
배부르다 배고프다
본연의 감각은 사라지고
뱃살이 나왔는지
근육이 붙었는지가 관건이다
맛을 느끼면서
혀는 짧아지고
배고픈 삶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지고
맛을 따라 탐욕이 늘고
세 치 혀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 혀 2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나?"
혀입니다"
“그럼 가장 하찮은 것은 무엇이나"
”혀입니다"
독사는 빗물을 받아먹고 독을 만들고
나무들은 빗물로 맛있는 과일을 만드는 법
당신이 감미롭게 뱉는 말도
돌고 돌아
혀들이 얽기고설키면
험악한 독설이 될 수 있는 법
당신의 혀는 얼마나 고귀한가?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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