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의 시조(11)

by 김창집1 2026. 1. 8.

 

♧ 붉은 겨우살이

 

눈 덮인 침엽들은 무디어질 줄 모르고

졸참나무 비워서야 진실이 보이네

산 노루 날 선 울음은 온 산을 뒤흔들며

 

순풍엔 엎드려도 맞바람엔 일어선다

평생의 화두 하나, 폭설 속의 불씨야

법정사 도도히 울리던 시대의 정신이야

 

더부살이 자존인가 눈빛은 고결했네

디딜 땅 없어도 역경만은 아니란 듯

발붙일 세상은 여기, 허공에다 길을 내고

 

긴긴날 기도하듯 여태 꿰는 염주 알

이따금 직박구리 빈 배 속을 채워주며

늦겨울 바리때 드네 법의 다시 두르네

 

 

 

♧ 통발, 꽃들은 피어

 

통 통 통 뛰고 싶은데

누구도 부르지 않아

 

목을 길게 빼어

하늘에다 기도해요

 

노랗게 뜬 내 얼굴을

엄마는 알 거예요

 

밑창 터진 허공이라

디딜 곳이 없어요

 

다섯 송이 저들끼리

스크럼 짜고 있어요

 

세월을 꼬아 엮으면

단단히 잡을 거예요

 

 

♧ 거기 서 있다

 

너에겐 길이지만 나에겐 미로였어

예각의 햇볕 따라 하루의 반은 그늘인 곳

히잡 쓴 눈동자 속에 길 하나가 더 있어

 

삶의 빛깔만큼 삶의 굴곡도 많았을,

말과 말 사이 거미줄은 더욱 얽혀

갈수록 헛발만 돌아 길을 죄다 사라지고

 

살면서 만나는 건 골목을 만드는 일

배후도 배경도 없이 아득했던 초행길에

한 뼘의 하늘만 허락한 메디나가 그립다

 

---

*메디나 : 모로코 페즈의 구시가지로 9,500여 개의 골목으로 이루어짐.

 

 

 

♧ 추사의 진눈깨비 1

 

고단한 섬살이도

저를 닮은 꽃이 있어

 

섬을 돌던 향기들이

돌담 아래 모여들면

 

먼저 와

먹물을 푼다

내리는 밤

 

 

 

♧ 추사의 진눈깨비 2

    -취우醉友

 

풀 냄새

바다 냄새

이끼 낀 돌멩이 냄새

 

스치고 지나온 자리

봄을 모는 바람 냄새

 

취우의

한 획 한 획이

꽃 향을 몰고 오네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 (목언예원,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