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붉은 겨우살이
눈 덮인 침엽들은 무디어질 줄 모르고
졸참나무 비워서야 진실이 보이네
산 노루 날 선 울음은 온 산을 뒤흔들며
순풍엔 엎드려도 맞바람엔 일어선다
평생의 화두 하나, 폭설 속의 불씨야
법정사 도도히 울리던 시대의 정신이야
더부살이 자존인가 눈빛은 고결했네
디딜 땅 없어도 역경만은 아니란 듯
발붙일 세상은 여기, 허공에다 길을 내고
긴긴날 기도하듯 여태 꿰는 염주 알
이따금 직박구리 빈 배 속을 채워주며
늦겨울 바리때 드네 법의 다시 두르네

♧ 통발, 꽃들은 피어
통 통 통 뛰고 싶은데
누구도 부르지 않아
목을 길게 빼어
하늘에다 기도해요
노랗게 뜬 내 얼굴을
엄마는 알 거예요
밑창 터진 허공이라
디딜 곳이 없어요
다섯 송이 저들끼리
스크럼 짜고 있어요
세월을 꼬아 엮으면
단단히 잡을 거예요

♧ 거기 서 있다
너에겐 길이지만 나에겐 미로였어
예각의 햇볕 따라 하루의 반은 그늘인 곳
히잡 쓴 눈동자 속에 길 하나가 더 있어
삶의 빛깔만큼 삶의 굴곡도 많았을,
말과 말 사이 거미줄은 더욱 얽혀
갈수록 헛발만 돌아 길을 죄다 사라지고
살면서 만나는 건 골목을 만드는 일
배후도 배경도 없이 아득했던 초행길에
한 뼘의 하늘만 허락한 메디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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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 : 모로코 페즈의 구시가지로 9,500여 개의 골목으로 이루어짐.

♧ 추사의 진눈깨비 1
고단한 섬살이도
저를 닮은 꽃이 있어
섬을 돌던 향기들이
돌담 아래 모여들면
먼저 와
먹물을 푼다
진
눈
깨
비
내리는 밤

♧ 추사의 진눈깨비 2
-취우醉友
풀 냄새
바다 냄새
이끼 낀 돌멩이 냄새
스치고 지나온 자리
봄을 모는 바람 냄새
취우의
한 획 한 획이
꽃 향을 몰고 오네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 (목언예원,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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