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에 드리운 빛깔은 환하고
시월의 빛
창문에 길게 드리울 때
일제히 일어나 부유하는
오래 묵은 것들이 환하다
먼왓 출렁이는 조밭에
참새 떼거리 뿌려대는
잊었던 풍경 속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다
햇살이 누런 들녘에
허수아비의 십자가가 고달프다
졸음 겨운 오솔길에
부을 지르는 아지랑이
문득, 네가 보고 싶구나
깊어가는 계절
나무들은 맨몸으로 서고
풀벌레의 열정을 들으며
산 밑에 이르러
눈물이 나고나

♧ 수줍은 봄
어떻게 알았을까
배추흰나비
섬돌 밑 그늘
노란 민들레
수줍은 봄

♧ 복사꽃
꿩, 꿩!
한적한
들녘
초가집 울타리에
복사꽃이 화사하다

♧ 섬
그 섬
언제나 있다
빈 둥지에
미련 몇 낱
바람에 날리고
수평선의 고독
그리움이
파도치는 밤
등대를 높이 들고
무적(霧笛)은 울어
섬은
떠날 수 없다

♧ 산길을 가다가
한낮
나무들은 꿈을 꾸고
시간이 멎은 숲길에
“푸드득, 꺼꺼꺼껑껑!!"
온 산을 깨뜨리는 장끼
순간, 숲은
천길 물속에 들고
화들짝 깨어지는
그리운 사람들

♧ 수석(水石) 1
어느 곡(谷)
어느 강을 구르면서
수석이 되었나
천둥 벼락 지던 밤
구름 높은 산을 떠날 때
버릴 것은 다 버렸다
별빛으로 눈을 닦고
이슬을 먹으며 살면
부처가 되는가
가만히 보니 산이다
새소리 청아하고
흰 구름이 한가롭다
물소리, 바람 소리
득도의 먼 길에
뼛속까지 하얗게 벗기고
까만 수석이 되었나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 (푸른생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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