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월의 좌표
하늘에 올리듯이 사월이라고 써 놓은 나는,
요령을 흔들어 대는 신통력도 없는 나는,
꽃 피울 한 꼭짓점도 깨뜨릴 수 없는 나는,
곶자왈 굴속 깊이 아직도 숨어 있거나 덩그러니 고무신 안에 빗방울로 남은 말, 천지신명께 비손하는 새벽을 닮은 사람들 그 마지막 음절을 가지에 새긴 팽나무의 말, 그믐날 바람 불면 몸부림치다 흩어져서 돌담 네 귀퉁이 여전한 집터에 죽순으로 솟아나는 말, 별빛이 빠져나간 아이의 눈동자 속에 노루귀 꽃받침으로 하얗게 피어나도 끝끝내 죽청지 위에 쓰이지 못한 말 말 말, 그 발치 백비 앞에서 첩첩 적막을 해매는 나는,
봄은
뒤돌아볼 때마다 다정하게 깊어졌으나
뼈대 없는 겨울 이야기 부피만 더듬다가
다짐을 살려 내지 못해
자세 한번 바꾸지 못해
어쩌나
돌아가지 못한 흰 눈빛을 어쩌나
죽은 자들만 결의를 움켜쥐고 있는 모서리
혼자만 살아남은 운명처럼
마주 보는 한 사내

♧ 때죽나무의 시간
세상의 끝에서도
당당히 걷고 싶던 그 길
당신의 몸속으로 스스로
거두어들일 즈음
때죽나무가 흰 꽃을 떨구기 시작했다
고개 숙인 눈빛처럼
남겨 놓을 것이
꽃밖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꽃을 흩뿌려 완성하는 슬픔처럼
하얀 것은 죽음의 근원이어서
간절하게 지켜야 하는 끝도 있다
유월의 약속, 산전으로 가는 길
입김으로 녹인 겨울이 가고
귀 세웠던 봄이 가는 동안
어둠 속에 길을 내어 주던
달빛 같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입에 넣지 못한
한 숟갈 미음 같은
흰빛이 또 시려
차마 밟을 수 없어서
겨우 손바닥 받쳐 들고 꽃들을 줍는다
삶의 끝으로 모여든 사람들,
안간힘으로 꿈꾸던 세상을 생각한다
죽어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손바닥은 좁아 더 이상 꽃을 담을 수 없고
떨어지는 생생한 꽃들이 아찔해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눈과 벌어진 꽃들 사이
눈 둘 곳 없는 나무들 사이
퍼득, 날개 치는 소리 스쳐 갈 때
머리 위에 꽃을 떨구고 간 손,
누구였을까

♧ 흔
직박구리의 날카로운 울음
동백꽃을 붉게 흔들고
바람 속 꽃송이들은 불꽃처럼 피어올라
타는 냄새와 섞였다
밤낮으로 울리는 불안한 속보
화마는 끝없는 광기처럼 산과 들을 삼키고
마을과 사람들의 뿌리까지 휩쓸었다
검은 연기와 재가 하늘을 뒤덮고
숨조차 막힌 길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과 절규가 뒤엉켰다
겨우 살아남은 눈빛들이
불타 버린 집터를 응시하며
문드러진 눈물을 떨굴 때
동박새도 붉은 동백꽃을 한 송이씩 흘렸다
불붙는다는 말
불타는 것 같다는 말
동백나무조차 손사래 치던 날에
내 안의 붉음도 두려움 속에 피어올랐다
또 속보가 울렸다

♧ 나무와 새
히이- 오오-
방향 없는 경고음처럼
새벽하늘을 손톱으로 긁어 대는
호랑지빠귀 울음소리
창문이 희끄무레해지고 옆집 닭이 울어도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밤의 마지막 하품까지 쫓아내며
산 위 검게 흩어진 구름을 뚫는다
히이- 오오-
그녀도 삼십여 년 전 저리 울었을 것이다
땅끝마을 흙과 바람에 실려 자란 아들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군의관이 아닌
사병의 길을 택했던 아들을 하루아침에 묻고
날마다 울던 그녀의 울음은
점점 새소리를 닮아 갔을 것이다
히이- 오오-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마당 감나무에 앉아서 울기 시작한 새
마치 아들인 듯
새소리로 주고받던 안부가
품속으로 스며들 무렵
어미의 고무신 속에 알을 품은 새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난 두 마리 새끼를
고양이에게 빼앗기고
다시는 날아오지 않았다
히이- 오오-
그 후, 새를 기다리던 어미는 나무가 되어
뿌리의 힘으로 세상을 받쳤다
오늘,
잃었던 날들의 기억과 기다림을 흔들어 깨우며
다시 숨 쉬는 새와 나무
그 울음은 여전히,
히이- 오오-

♧ 곁
생색내지 않고
바람에 씨앗을 흩날리며
알뜰히 꽃을 피우는 낮은 들풀처럼
바람의 결로 땅의 상처를 꿰매는 위로처럼
젖은 목소리만으로도
생의 깊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바닥난 날
앓아도 쉴 곳 없어 헤매는 것을
바다 너머에서 어찌 알았는지
안부 전화를 걸어온 시인
“일을 그만둔다고 굶진 않겠지.
병원도 가고, 침도 맞고,
먼저 몸부터 챙겨.
쌀이 떨어지면 보내 줄게.
김치도,
텃밭 채소도.”
그 밤, 나에게도
따뜻한 배경이 생겼다
암과 오래 동무하며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는 시인
맑은 웃음소리로
빛을 건네는 그녀 곁에도
바람을 등에 지고
마음을 맡긴 민들레가
환하게 피었을 것이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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