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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2)

by 김창집1 2026. 1. 13.

 

♧ 사월의 좌표

 

 하늘에 올리듯이 사월이라고 써 놓은 나는,

 요령을 흔들어 대는 신통력도 없는 나는,

 꽃 피울 한 꼭짓점도 깨뜨릴 수 없는 나는,

 

 곶자왈 굴속 깊이 아직도 숨어 있거나 덩그러니 고무신 안에 빗방울로 남은 말, 천지신명께 비손하는 새벽을 닮은 사람들 그 마지막 음절을 가지에 새긴 팽나무의 말, 그믐날 바람 불면 몸부림치다 흩어져서 돌담 네 귀퉁이 여전한 집터에 죽순으로 솟아나는 말, 별빛이 빠져나간 아이의 눈동자 속에 노루귀 꽃받침으로 하얗게 피어나도 끝끝내 죽청지 위에 쓰이지 못한 말 말 말, 그 발치 백비 앞에서 첩첩 적막을 해매는 나는,

 

 봄은

 뒤돌아볼 때마다 다정하게 깊어졌으나

 뼈대 없는 겨울 이야기 부피만 더듬다가

 다짐을 살려 내지 못해

 자세 한번 바꾸지 못해

 

 어쩌나

 돌아가지 못한 흰 눈빛을 어쩌나

 죽은 자들만 결의를 움켜쥐고 있는 모서리

 혼자만 살아남은 운명처럼

 마주 보는 한 사내

 

 

 

♧ 때죽나무의 시간

 

세상의 끝에서도

당당히 걷고 싶던 그 길

 

당신의 몸속으로 스스로

거두어들일 즈음

때죽나무가 흰 꽃을 떨구기 시작했다

 

고개 숙인 눈빛처럼

남겨 놓을 것이

꽃밖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꽃을 흩뿌려 완성하는 슬픔처럼

 

하얀 것은 죽음의 근원이어서

간절하게 지켜야 하는 끝도 있다

 

유월의 약속, 산전으로 가는 길

 

입김으로 녹인 겨울이 가고

귀 세웠던 봄이 가는 동안

어둠 속에 길을 내어 주던

달빛 같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입에 넣지 못한

한 숟갈 미음 같은

 

흰빛이 또 시려

차마 밟을 수 없어서

겨우 손바닥 받쳐 들고 꽃들을 줍는다

 

삶의 끝으로 모여든 사람들,

안간힘으로 꿈꾸던 세상을 생각한다

죽어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손바닥은 좁아 더 이상 꽃을 담을 수 없고

떨어지는 생생한 꽃들이 아찔해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눈과 벌어진 꽃들 사이

눈 둘 곳 없는 나무들 사이

퍼득, 날개 치는 소리 스쳐 갈 때

머리 위에 꽃을 떨구고 간 손,

누구였을까

 

 

 

♧ 흔

 

직박구리의 날카로운 울음

동백꽃을 붉게 흔들고

바람 속 꽃송이들은 불꽃처럼 피어올라

타는 냄새와 섞였다

 

밤낮으로 울리는 불안한 속보

화마는 끝없는 광기처럼 산과 들을 삼키고

마을과 사람들의 뿌리까지 휩쓸었다

검은 연기와 재가 하늘을 뒤덮고

숨조차 막힌 길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과 절규가 뒤엉켰다

 

겨우 살아남은 눈빛들이

불타 버린 집터를 응시하며

문드러진 눈물을 떨굴 때

동박새도 붉은 동백꽃을 한 송이씩 흘렸다

 

불붙는다는 말

불타는 것 같다는 말

동백나무조차 손사래 치던 날에

내 안의 붉음도 두려움 속에 피어올랐다

 

또 속보가 울렸다

 

 

 

♧ 나무와 새

 

히이- 오오-

방향 없는 경고음처럼

새벽하늘을 손톱으로 긁어 대는

호랑지빠귀 울음소리

 

창문이 희끄무레해지고 옆집 닭이 울어도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밤의 마지막 하품까지 쫓아내며

산 위 검게 흩어진 구름을 뚫는다

 

히이- 오오-

그녀도 삼십여 년 전 저리 울었을 것이다

땅끝마을 흙과 바람에 실려 자란 아들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군의관이 아닌

사병의 길을 택했던 아들을 하루아침에 묻고

날마다 울던 그녀의 울음은

점점 새소리를 닮아 갔을 것이다

 

히이- 오오-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마당 감나무에 앉아서 울기 시작한 새

 

마치 아들인 듯

새소리로 주고받던 안부가

품속으로 스며들 무렵

어미의 고무신 속에 알을 품은 새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난 두 마리 새끼를

고양이에게 빼앗기고

다시는 날아오지 않았다

 

히이- 오오-

그 후, 새를 기다리던 어미는 나무가 되어

뿌리의 힘으로 세상을 받쳤다

 

오늘,

잃었던 날들의 기억과 기다림을 흔들어 깨우며

다시 숨 쉬는 새와 나무

 

그 울음은 여전히,

히이- 오오-

 

 

 

♧ 곁

 

생색내지 않고

바람에 씨앗을 흩날리며

알뜰히 꽃을 피우는 낮은 들풀처럼

바람의 결로 땅의 상처를 꿰매는 위로처럼

 

젖은 목소리만으로도

생의 깊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바닥난 날

앓아도 쉴 곳 없어 헤매는 것을

 

바다 너머에서 어찌 알았는지

안부 전화를 걸어온 시인

 

“일을 그만둔다고 굶진 않겠지.

병원도 가고, 침도 맞고,

먼저 몸부터 챙겨.

쌀이 떨어지면 보내 줄게.

김치도,

텃밭 채소도.”

 

그 밤, 나에게도

따뜻한 배경이 생겼다

암과 오래 동무하며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는 시인

 

맑은 웃음소리로

빛을 건네는 그녀 곁에도

바람을 등에 지고

마음을 맡긴 민들레가

환하게 피었을 것이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