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 보나'의 시(7)

by 김창집1 2026. 1. 15.

 

♧ 제주 새천년 북한 감귤 보내기*

 

북한 쇄빙선이 얼음을 깨자

배는 꾸욱꾸욱 바다를 누르며 나아간다

 

평안남도 남포항에 내린 귤 100톤

콘테나에 담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뱃길보다 느린 행정 절차를 마치고

화물선에 한 달 동안 있던 귤 상자를 열자

뭉개지고 짓물러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꽃도 아닌데 해처럼 노랗다고

닭알 같으니 품으면 귤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갖고 온 그릇에 귤 한 삽씩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 뒤로

귤잎 같은 아이들이 시린 손을 히히 불며 종종 따라 간다

 

언 눈과 별 말고 밝을 것이 없는 밤에

담요 덮고 귤 까먹으며 알맹이 터질 때마다 웃고 있겠거니 했는데

 

짓무른 귤을 껍질째로 보리밥과 말아 먹고 비벼 먹었다고

맛이 어떠냐 물어보았더니 처음 먹어 보는 맛이라 했다

 

두 손에 귤 감싸고 천천히 걸어가는 주민들이 눈빛으로

제주는 어떤 곳이길래 한겨울에 봄볕 같은 열매가 열리는지 묻는 듯하여

 

바다가 얼지 않는 곳이에요

산이 덮이도록 진달래가 솜뿍 피어나는 곳이에요

느리게 목례하며 말랑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 해는 귤껍질을 까고 세 개씩 낱개로 먼저 나눠줬다

 

---

*1999년 제주운동본부는 새천년을 맞아 북한에 감귤을 보냈다.

 

 

 

♧ 제주호*

 

만나는 이들은 없고 떠나는 이들만 가득한 항구에

별은 악착같이 빛난다

 

이별은 뭐든 정확한 것과 가까이할 수 없는 것

항구에서는 문법을 파괴한 노래만 부르네

 

엉켜 버린 바람 비명 같은 파도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선창에 머리 풀어헤친 여자들

리어카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

매달리고 엉겨 붙고

배고픔으로 사랑을 아는 항구의 밤

 

소리소리 지르는 이름 따라 흩날리는 눈발들

겨울은 항구에 닿아서는 안 되는 것

악다구니같이 손 흔들고

두 손 가지런히 맞대고 웃으면

잠시 따뜻해진다 등대가 배를 밀어낼 때까지

 

겨울을 끌고 떠나는 배에서

울음이 뱃고동 소리보다 크다

 

---

* 1959년 미군 군수 물자 운송선을 개조하여 제주와 여수 항로에 취항했던 배.

 

 

 

♧ 나의 다락이었네

 

목걸이는 먼 곳에서 왔네

소라가 무역선 타고 일본 항구에 내려

백화점, 고급 요릿집에서

물속 반짝이는 빛을 모은 곳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모은 곳

 

숨 들이쉬고 아리가또

스미마셍 내쉬고

 

목 안고 꼭 잡은 손 종알종알 돌담들 수선화

 

숨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사이

밀려오는 얼굴 겹겹이 둘러

울고 외치는 영법泳法

 

달도 넘치고 탈도 넘칠 때

깔딱깔딱 잿빛 물결 가지고 살아간 곳

목을 걸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모진 영법泳法

 

물길 없는 곳은 바닥을 쳐서 물길 만들고

폐선처럼 녹난 벌건 손이 보내온

 

목걸이가 나의 다락이었네

다락에서만 배꼽을 만졌네

 

 

 

♧ 난바르 물질*

 

아빠는 몰래 다녀갔다

아빠가 다녀가지 않았다는 믿음보다

다녀 갔다는 믿음이 나를 잠에서 깨게 했다

 

엄마는 몰래 바다에 갔다

엄마가 바다에 가지 않았다는 믿음보다

바다에 갔다는 믿음이 나를 잠들게 했다

 

믿음은 흔적이 없다

엄마가 바다에 다녀온 흔적을

아빠는 잘 찾고 가져 간다

우리를 찾은 적은 없다

찾을 거란 믿음이 부끄러운 적도 있다

믿음은, 부끄러움은 지치고 열병보다 심하게 앓는다

 

희망은 흔적이 있다

너무 깊은 곳은 혼자 볼 수 없어서

여럿이 힘껏 문을 열듯 뛰어들었다 한다

바다가 과즙처럼 달았다고

입가에 흘러내리는 바닷물을 닦아 드시는데

희망은 부끄러운 적이 없다

 

끝없는 바다, 석양이 뭍처럼 보이는 곳

부딪히고 깨지고 부딪히고 깨지며

사랑은 젖고,

피는 마르고 머릿속이 새하얘져도

잊지 못하는 난바르 해맑은 파도

 

---

*먼바다 물질 혹은 배에서 한 동아리의 해녀가 일정 기간 숙식하며 치르는 물질 작업을 일컫는 말.

 

 

 

♧ 할망 손지*

 

물에매 동팬으로 벋언 버듸당 가젱이 그창 오라

넉 댕기던 질 카르지 말게 새벡 인칙 바당더레 와사 헌다

 

요왕대신님 산앙대신님 동으로 터오르는 동방선님

서으로 디고 가년 낙후자님 이디레 뭬셤수다

 

파도 소리를 가르는 외할머니

살아생전 가장 기운찬 소리

 

유월 초하루 바당물 먹엉 삼넉三魂이 나강 덕을 들엄수다

기미년 구월 닷새생 허칩이 ᄄᆞᆯ 혼은 아홉 설

넉이 나고 혼이 나수다

하늘더레 허튼 넉 땅더레 허튼 넉 바당에 ᄂᆞᆯ던 덕 요런

넉이랑 허칩이 혼은 아홉설 요듸레 돌아옵써 어마 넉 들라

아 어마 넉들라아에, 코오

 

외할머니 남은 혼을 네게 불어넣은 것처럼 큰 숨이

정수리로 들어왔다 바람은 따뜻하게 불고 순간 몸이 잠시 떠올랐다

 

버듸낭으로 등 아홉 번 어깨 아홉 번 치고

허칩이 ᄄᆞᆯ 혼은 아홉 설

울음 주는 새 열 주는 새 새얼 ᄃᆞ리자 새얼 ᄃᆞ리자

 

손이 신음하듯 살아생전

가장 억센 손이었다 몸 속이 쿨럭였다

 

팔다리 머리를 꾹꾹 누르고 등을 치며 쌀을 뿌리고

새얼 ᄃᆞ리자 새얼 ᄃᆞ리자

저레 쑤어나라 바당더래 ᄃᆞ르라

 

한참 뛰다 뒤돌아보니 나는 마흔이 넘었고

젊은 외할머니 계시던 자리

억새만 흔들렸다 수의처럼

 

---

* 제주에서는 어린아이의 넋이 빠져나가 아플 때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넋이 나간 장소에서 넋들임 굿을 한다.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