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열음이 파열하며
아버지는 평생 청유를 모르셨고
어머니의 언어는 오로지 직유였다
고시원 쪽방 좁은 창
그들의 균열로 오늘을 유지하는
나는 그들의 은유
몰래 훔친 핀을 건네자
분홍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피-”
오후의 공기를 파열하던
“피-”
검기울던 운동장을
찰랑거리며 팔랑거리며 나서던
얼굴이 지워진
사랑했던 소녀
축제의 밤
불꽃과 환호가 터지면
파열음의 늪을 가득 채우는
지워진 얼굴의 분홍
입술 입술 입술들
이 밤은 가장 검음이야
너는 나의 새벽이야
다정한 직유가 나를 깨운다
파열음이 파열한다
비릿한 평화
나는 한참만에
어머니로 향하는
단축번호를 누른다
♧ 비밀
우리의 공기는 다른 맛이었지
너는 매일 하루를 점쳤고
나는 내일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지
울음을 참듯이
중력을 꾹꾹 누르듯이
너는 두려워했지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어
박제된 비밀이 뭔 줄 알아?
시간의 뒤통수엔 비밀이 없다는 거야
울다 잠든 너의 장기를 조금씩 뜯어 태우지
나는 두렵지만 너는 가벼웠으면 좋겠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날
너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떠날 테니까
빈 방에 남겨진 나는
곱게 벗긴 우리의 속을 너의 필체로 채울 테니까
비밀이라는 비밀을 잊게 될 테니까
♧ 판례독법
사건은 대개 ‘도중’에 태어난다
너의 등을 툭 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도중’에만 겹쳤기 때문
서로의 사건이 아니었으니 모르는 사이었기 때문
나와는 상관없는 판례를 읽듯 너를 추측해본다
그것은 비좁은 알 속에서 알을 굴리고 있다 여기는 것
예의 없이 엎지르는 주문
반쯤 그른 알은 굳어가고 있겠지, 나처럼
알 속 골목골목 사건들은 비밀스럽거나 지독하거나 흐릿해지겠지, 나처럼
신속한 감정鑑定과 위로
기본 조항은 질감이 다른 각자의 고독을 견딜 것
아는 척에서 모르는 척으로 진화해 갈 것
걸지도 않은 연락처를 저장 후 느끼는 식욕과 요의 그리고 한 번 더 마주치지 않기를
남은 존속기간
하루의 종기가 도래하는 ‘도중’
*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 (애지 시선 120,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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