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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4)

by 김창집1 2023. 12. 7.

 

 

파열음이 파열하며

 

 

아버지는 평생 청유를 모르셨고

어머니의 언어는 오로지 직유였다

 

고시원 쪽방 좁은 창

그들의 균열로 오늘을 유지하는

나는 그들의 은유

 

몰래 훔친 핀을 건네자

분홍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

오후의 공기를 파열하던

-”

 

검기울던 운동장을

찰랑거리며 팔랑거리며 나서던

얼굴이 지워진

사랑했던 소녀

 

축제의 밤

불꽃과 환호가 터지면

파열음의 늪을 가득 채우는

지워진 얼굴의 분홍

입술 입술 입술들

 

이 밤은 가장 검음이야

너는 나의 새벽이야

다정한 직유가 나를 깨운다

파열음이 파열한다

 

비릿한 평화

나는 한참만에

어머니로 향하는

단축번호를 누른다

 

 

 

 

비밀

 

 

우리의 공기는 다른 맛이었지

 

너는 매일 하루를 점쳤고

 

나는 내일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지

 

울음을 참듯이

 

중력을 꾹꾹 누르듯이

 

너는 두려워했지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어

 

박제된 비밀이 뭔 줄 알아?

 

시간의 뒤통수엔 비밀이 없다는 거야

 

울다 잠든 너의 장기를 조금씩 뜯어 태우지

 

나는 두렵지만 너는 가벼웠으면 좋겠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날

 

너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떠날 테니까

 

빈 방에 남겨진 나는

 

곱게 벗긴 우리의 속을 너의 필체로 채울 테니까

 

비밀이라는 비밀을 잊게 될 테니까

 

 

 

 

판례독법

 

 

사건은 대개 도중에 태어난다

 

너의 등을 툭 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도중에만 겹쳤기 때문

 

서로의 사건이 아니었으니 모르는 사이었기 때문

 

나와는 상관없는 판례를 읽듯 너를 추측해본다

 

그것은 비좁은 알 속에서 알을 굴리고 있다 여기는 것

 

예의 없이 엎지르는 주문

 

반쯤 그른 알은 굳어가고 있겠지, 나처럼

 

알 속 골목골목 사건들은 비밀스럽거나 지독하거나 흐릿해지겠지, 나처럼

 

신속한 감정鑑定과 위로

 

기본 조항은 질감이 다른 각자의 고독을 견딜 것

 

아는 척에서 모르는 척으로 진화해 갈 것

 

걸지도 않은 연락처를 저장 후 느끼는 식욕과 요의 그리고 한 번 더 마주치지 않기를

 

남은 존속기간

 

하루의 종기가 도래하는 도중

 

 

 

           *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 시선 120,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