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5)

by 김창집1 2023. 12. 8.

 

 

감성온도계

 

 

뜨거운 마음을 싸도 겨울 도시락은 메지근하고

 

땀을 씻는 그대의 휘파람은 산도록하고

 

내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대 가슴 석석하고

 

타다가 꺼진 재는 흑이 되어 써넝 써넝

 

눈물 길이로만 자라는 고드름 온도는

 

써굴라, 앗 써굴라아 손만 잡아도 녹는데

 

 

 

 

보말보다 맛 좋은 말

 

 

  우리가 까먹은 말이 나뒹굴고 있네요

 

  가난 겨우 빠져나간 갯가 바위틈에

  밤고둥 먹보말, 눈알고둥 문다데기, 두드럭고둥 메옹이, 팽이고둥 수두리보말

  고소한 말 쌉싸롬한 말 메코롬한 말 담백한 말 백중날 저녁이면 삶은 고둥 양푼에 매달려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들은 말 옮기며 보말죽 보말칼국수 소문 자자한데 깐 보말 얼른 내밀며

  “나 강생이 이래오라

 

  할머니 이 한 마디면 난 벌이 되고도 남아

 

 

 

 

이왕이 기왕에게

 

 

태어나 들으면서 자란 말이 왕이었다

 

어두워져 어두왕

밝아오면 ᄇᆞᆰ아왕

비바람 열두 달 일상처럼 싸워 싸왕

봐도 봐도 아깝네 아까워서 아ᄁᆞ왕

해 끼치는 일은 남 부끄럽다고 ᄂᆞᆷ 부치로왕

아는 게 힘이다 배워라 배워 배왕

금이야 옥이야 잘 길뤄줘서 질루왕

제주형 밥상머리가 왕왕하며 날 키왕

지나고 보니 그때가 그리워서 그리왕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이냥 살아도 좋겠다

 

 

 

 

양이 진다

 

 

양 양 부르면 해가 반짝 돌아보곤 했지

삼춘보다 양 삼춘하면 봄볕 한 줄 끼어들어

언어와 언어 사이에 넉살 좋은 무지개 뜨고

 

양은 네, 저기요와 뿌리를 공유하던 말

사전으론 다 품을 수 없는 폼 내 나는 말

말 틀 때

얼어붙을 때

군불처럼 지피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의 집을 더듬네

하얗고 순한 감촉 초원을 수놓던 억양

말꼬리 잘라 먹으며 노을을 건너가네

 

 

 

 

문자 돋아나는 봄

 

 

한 소쿠리 글을 먹으며 봄 한철을 살았다

혀를 감싸 안는 자모음 유전자들이

나라는 행성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끊임없이 짝을 바꾸는 새것들의 염기서열

꿩마농 들굽을 먹고 달래 두릅이라 쓰는

암묵의 문자서열은 입맛 따라 바뀌지만

 

사는 건

밥 먹고 밥이 되는 무한반복의 장르

풀 먹은 소가 밭을 갈고

사람은 읽기에 좋았다는

 

나물은 고전이었다

볼록렌즈가 쌉싸름했다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