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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6. 1. 16.

 

♧ 빛과 그림자 - 박종선

 

흩어진 이름 위로 아침이 얹힌다

같은 자리에서 밤이 길어진다

 

너 없는 창이 더 환해질수록 내 안의 골목은 더 깊어진다

 

놓아 버린 손금에도 미세한 반짝임이 남고 빈 손바닥엔 서늘한 그늘이 스민다

 

나는 나를 비추는 법을 배운다

너를 가리지 않고 서는 법을 익힌다

 

빛과 그림자가 포개지는 곳,

혼자 선 나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 바닥의 얼굴 – 방순미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닥

 

더 이상

바닥이 없을 때의 절망,

 

그게 어디까지냐고

가슴 친 적 있다

 

죽을힘 다해

나아가고 있을 때

 

꼬리별처럼 눈에 밟히던

내 그림자 선명하다

 

 

 

♧ 표절장고剽竊掌考 - 오명현

 

하연재가 유치원 다니면서는

하삐* 생일 때

하삐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면서

초록 참이슬 병 그림을 연거푸 선물하더니

 

세륜초교 2학년이 되고서부터는

저녁상에 올릴 초록 참이슬 병을 가지러

냉장고로 향하는 하삐를

완강하게 막아서곤 한다

 

원작자와 각색자쯤 되는 함미*와 엄마는

저작권을 침해당하고도 옆에서 지켜만 볼 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흐뭇해하기까지 한다

 

---

* 하비와 함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재식 호칭법이다.

 

 

 

♧ 성묘 – 윤순호

 

보리 고랑 타고

녹색 파도가 일렁이는 날

양지바른 선영에 육탈 아버지 모신 후

떼만 쓰다듬는 어머니의 맨손은

한사코 사랑이었습니다

철 따라

부랴부랴 쑥 나부랭이도 뽑고

두더지 구멍인들 정성으로 메웠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어머니의 고무신은 이슬에 젖었습니다

어느덧

홀연히 당신마저 가신 뒤

헤아리지 못한 불효는

새치가 무성하도록 후회만 앞세우고

오직 무릎 꿇어 조아릴 뿐입니다

그곳에도 지금

저렇듯 슬피 우는 뜸부기를 듣는지요

 

 

 

♧ 돌확 – 이령

 

그녀의 뇌에 멍이 들었다

밖이 세찰수록 안으로 파고들었을 그녀의 허방

혹이 자라고 있었다

 

빠진 머리카락을 걷어 낼수록

패인 서사는 그림자 쪽으로 깊어졌다

 

키 작은 지붕 아래 더 작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집

외판 가방을 든 그녀의 처진 발걸음이 골목에 달강이면

써 보지 못하고 팔기만 하던 화장품 냄새가

기다림보다 녹슨 대문을 먼저 밀고 들어섰다

 

그런 날이면

종일 약 올리던 신작로 달고나 냄새와

세상에 속하지 못해 늘 만취였던 아비의 구린 입냄새

가난의 내력처럼 번지던 곰팡이 냄새까지

골목의 서러운 냄새란 냄새는 다 따라들었다

 

돌확은 오래 견더왔을 것이다

천천히 구멍을 키웠을 것이다

 

모르핀에 취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

안으로 품는 일에만 익숙했던 엄마

아직 귀는 살아 있다기에 불러 보면

무량 사랑하다 무량 이별을 고하는

 

받아 낸 만큼 깊어졌을 저 움푹한 홈

 

외상장부에 올려진 이름처럼

갚을 길 영영 없어 천지가 캄캄하다

 

세상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혹이 자라고 있다

 

 

                            *월간 『우리詩』 1월호(통권 제45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