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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의 시(8)

by 김창집1 2026. 1. 17.

 

♧ 철쭉꽃 한 송이

 

  현관 앞에 유난히 붉은 철쭉꽃 한 송이 때늦게 피어나자 둔감한 내 사유思惟도 퍼뜩 피어나 나를 들이대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꽃잎에 흰나비 앉는다 바람이 비틀비틀 앉는다 요즘의 내 사념이 따라 앉자 내 여자가 앉는다 어젯밤 떨어진 별똥별이 돌아와 앉는다 사흘 후 꽃의 안색이 변했다 아프다는 표정이다 기어이 떨어지며 그림자를 덮는다 내 사념을 배회하던 별똥별이 떨어진다 내 여자가 떨어진다 내가 떨어진다 내가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떨어진다 아, 다들 꽃이었다며 떨어진다.

 

 

 

♧ 그림자에게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내가 있으면 너도 있지

한 천 년 속세를 다니며

어느 갯가에 앉은 갈매기

어느 오름에 앉은 구름

나도 보고 너도 보고

 

어느 누가 보고파서

어느 사랑이 슬퍼서

내가 울고 너도 울고

 

그러나 우리 있잖아

나 죽고 너 살아

한 천 년 더

세상을 품고 와서

내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 제주공항에서

 

눈 감고 착륙을 맞으려는데

제주공항 활주로 돌풍 탓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연달아 두 번의 복행

 

맞잡고 땀이 흥건한 양손

나보다 더 놀라던

기내 조명등 아래 내 그림자

 

기어이 착륙하고

공항 대합실을 나선다

끝내 날 놓지 않았다며

입을 배시시 여는

서늘한 내 그늘의 웃음

 

 

 

♧ 곱을락

 

고븜재기* 홀 사름 이디 부뜨라

 

나 안주왜기손가락*에

나 그림제가 부뜬다

 

저 마당에 강 ᄒᆞ게

아니, 이 폭낭 아래서 ᄒᆞ게

 

나영 나 굴메가 ᄃᆞ툰다

하늘은 ᄆᆞᆰ고

폭낭 굴메*가 더 거명ᄒᆞ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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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을락•고븜재기 : '숨바꼭질'의 제주어.

*안주왜기손가락 : 검지손가락.

*굴메 : 그림자.

 

 

 

♧ 또 하루를 산다

 

오늘은 종일 맑은 날

짧았던 정오의 섭섭함을 잊으려

몸부림치며 서산으로 해를 밀었다

 

길어진 내 그림자

빌딩 벽을 타고 오른다

설마 이쯤에서 떨어지려는 건 아니겠지

 

조심하라고 손을 흔드니

걱정 말라며 되흔들어 준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또 하나의 나

나를 붙들고 또 하루를 산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