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 피울 나이 – 윤태근
언제부터일까?
먼 별들의 속살거림에
목구멍이 간질대더니
이웃한 혹성 흙바람에
손끝이 시리더니
극지방 빙하 녹는 눈물에
눈이 아리고
아프리카 사막 어느 낙타의 게거품에
입안이 쓰리더니만
먼 나라 전쟁터 어디선가
흙덩이 하나 가볍게 들어 올린
새싹의 기운 받음일까?
이제야 저승꽃 서너 송이 피워 올린다

♧ 비 오는 날
장맛비 퍼붓는 날
창문을 닫고
굵은 빗줄기를 바라본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하늘을 지배한
여름 장맛비
나는 왜 젖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창밖의 나무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끌어안고
촉촉이 젖어 가면서
젖는 기쁨을 누리고 있건만
나는 작은 빗줄기에도
허겁지겁 도망만 다니다
장맛비와 제대로 맞서 본 적 없으니
내 삶은 얼마나 건조한 것일까
비 오는 날이면
창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저 물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으니

♧ 종부
그녀는 30이 되기 전부터
매년 14번이나 금고형을 받는다
헌법이나 법률 조문에도 없는 가문 때문에
거창한 양반의 40대 종손을 만난 이유로
더없이 바쁜 생업을 포기하고
본적도 없는 조상의 제사상을 차린다
먼지만 쌓여 가는 39대 종손은
빈 곳간은 알 턱이 없는지
철마다 옷과 음식을 보내라 하고
알지도 못하는 일가친척의 생일까지 챙기라고 하니
양반 중에 큰 양반이다
살아야 하는 다급한 마음으로
미움과 적개심이 담긴 제물은
사뭇 검다
결연한 투쟁으로 삼십 년 만에
네 개의 독상을 한 개로 줄였다
조상을 위하여

♧ 난촉 – 임미리
희비의 파편에 상처 입은 날이었다.
마음은 바닥의 경계를 헤매었는데
동양란이 배달되어 책상에 올려 두었다.
기꺼이 정성을 다한 줄 알았는데
사계를 보내며 한 잎사귀씩 시들어 가더니
몇 잎사귀만 남아 마음이 소란스럽다.
시골집 마당으로 돌려보내야지
햇살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연민이 스민다.
고단한 생을 함부로 보내는 허공 사이로
햇살 서성거리는 아침, 소리 없는 외마디처럼
촉 하나 쑤욱 올라와 흐뭇한 마음이 환하다.
원래 돋아났던 잎사귀보다
더 튼실한 초록이 쫑긋 귀를 세운다.
보내려는 망설임의 마음을 헛디뎌
오롯이 자라나는 것을 마주한다.
너는 희망 하나 속삭여 줄지 모르겠는데
마음 자락 벌써 향기로 흩날리고
꿈 하나 꽃망울처럼 부푼다.
앞서는 마음 깊은 곳 싱그러운 여백이다

♧ 소멸과 환대 – 정성호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속절없이 떠나갑니다
머지않아 저는 먼지 속으로 사라집니다
아직 죽어 본 적이 없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지만
저의 후예들이 저의 몫까지 계속 살아갈 겁니다
지금까지 지내면서 살갑고 정겨웠던 그대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먼저 가서 그대들이 오시면
길마중 나가겠습니다
낙엽 올림
*월간 『우리詩』 2026년 1월호(통권 제45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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