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너지는 사내들
정상이 바로 저긴데
바라다보다,
올려다보다
무너지는 사내들.
젖은 꽃 밟고 넘어져
미끄러져 내리다,
만년설 속에 묻혀
얼음미라가 되는 사내들.

♧ 세상에 가장 단 것은 죄의 맛이다
죄짓는 재미
얼마나 달면
날이 날마다
신문 방송마다 그리 요란할까
모자 눌러 쓰고 고개 푹 숙인
뻔뻔한 얼굴들이 줄을 잇는다
'죄지은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데
왜 죄는 어두워 보이지 않는가?

♧ 치자꽃 시들다
푸르도록 시리던 내 영혼도
어느 날 홀연히
시들어 버렸다
누렇게 변한
초라한 몰골
가지 끝에서 떨어질 일만 남았다
여름날은 이렇게 가고 마는가

♧ 기청제祈晴祭
살아 있어 사람이니
눈물 젖은 미소가 어찌 없으라
내가 고요하지 못하니
하늘이 맑고
호수가 잔잔할 리 있겠는가
머릿속이 흑과 백,
때로는 까매서 하나도 보이지 않고
어느 땐 하얘서 아무것도 없는 듯
텅 비어 있는 세상이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허망함이여
하늘이 개고 세상이 맑기를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늘이여 하늘이여 비노니!

♧ 전야
내리 두 달 물폭탄을 퍼붓다
조용하니 더 무섭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저 푸른 하늘이.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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