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 이 가을에도
마당의 감나무, 봄바람에
연둣빛 입새 하늘거리던 날이 엊그제던데
우듬지에 만추의 단풍진 이파리 몇 잎
달랑달랑 걸어놓고
하얀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휘감기는 연륜, 세월의 계단을 오르다 보니
푸르렀던 청충의 내 어깨 위로도 어느덧
가을이 접어들었고
쓸쓸한 계절을 노래하는 이 시점
우듬지 꼭대기에 달린 까치밥 마냥
외롭고 쓸쓸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내 안을 단풍진 잎처럼
곱게 물들이는 벗들이 있다
내 안의 벗들
시공간을 넘나들며 출렁거릴 때
이렇다 할 아무런 동요도 없이
끝없이 끝도 없이 번지는 벗들과의 사랑
미흡하지만 강심장으로
드디어 일굴 내미는 나의 벗들

♧ 봄이 오는 강가에서
인적 뜸한 입춘 넘긴
탄천의 강 둔치
하안 눈 위
바람 매서운 동토는
정들 곳 하나 없는 차가운 천지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오직 하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듯한
내가 끌고 온 발자국들만이
미련처럼 나를 따르며
눈발 날리는 동면의 대지 위에
인적의 흔적을 남긴다.
봄은 아직 저 먼 곳에 있다지만
그러나 내 마음엔
벌써 봄의 떨림을 느끼고 있다.

♧ 손으로 만지는 봄
입춘 넘겨 봄소식 기대하지만
앙금처럼 가라앉은
마지막 마디의 겨울
도심 산책의 밤
순간 호주머니에 손이 들어가고
그 속에 보온된
내 체온을 만지작거린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피는 따사함이
봄 햇살처럼 시린 손에 닿음에
생각은 한결
개나리 꽃그늘 흐드러진
봄날을 닮아가네.

♧ 4월의 숲길
문명의 공간을 떠나 무성한 숲길
혼자서 수도승처럼
호젓이 걸어갈 때
잎사귀 사이 흐르는 바람은
연인처럼 살랑살랑
나의 고단한 생각들을 달랜다.
푸름 속에 눈이 맑아지니
영혼이 맑아지고
가슴엔 연둣빛 떡잎이
다정처럼
돋아나며 마침내
사색으로 다다르는 초록의 경지.

♧ 5월을 보내며
곱디고운 얼굴로 찾아와 그간
정답게 지내다
화사한 자취만 남기고 가버린,
마음속 깊게 간직한 연인이
안녕이란 한마디 말도 없이
훌훌 떠나버린 것과도 같아
진솔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은
섭섭한 마음이 연둣빛에 맴돌고
나는 계절의 여울목에 서서
황홀하리만치
진 녹으로 물들어가는
연록의 푸른 정원에서
진 녹의 여름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김창화 제5시집 『섬의 아우성』 (춘강출판,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겨울호의 시(2) (0) | 2026.01.31 |
|---|---|
| '애월문학' 2025 제16호의 시(2) (2) | 2026.01.30 |
|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의 시(4) (1) | 2026.01.28 |
| '한수풀문학' 제20호의 시(1) (0) | 2026.01.27 |
| 강연익 시집 '노을을 붙잡고'의 시(7) (0) | 2026.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