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겨울호의 시(2)

by 김창집1 2026. 1. 31.

 

♧ 항해일지(1) -김병택

 

바다는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도

아늑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손에 부딪힐 때는 항상 차가웠다

 

나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테트라포드가 흔들릴 만큼

바다에 큰 물결이 일었던 적이 있음을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큰 물결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서둘러 항구로 달려가곤 했다

 

오늘 새벽, 어제와는 다르게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바람이 불었다

상승하는 육신의 피로를 다스리며

종일, 허술한 돛대를 점검했고

녹슨 엔진들을 찾아내 일일이 닦았다

 

혹여, 구름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희망의 근원을 향해

두 손 모으는 저녁이 되었을 때 깨달았다

일 년 내내 바다를 오가는 것은

남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떠도는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일상생활의 일부임을

 

내일 아침에는 흰머리에 헌팅캡을 쓰고

생각의 작은 물방울들을 밀어내며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거친 물결과 함께

 

 

 

♧ 물 아래 옥돌 같은 - 김수열

   -이옥순

 

  1

  오늘도 먼 산만 바라본다 내 아기 눈 덮인 골짜기에 잠이 들었나 바람 부는 벌판에 잠들었나 가을 단풍 낙엽 속에 잠들었나 보고 싶은 내 아기 너와 헤어질 때는 늦은 가을이었는데 10월 달 밝은 밤에 만나자고 약속했건만 칠십 년 지나도록 소식도 모습도 알 수 없으니 떠오르는 건 마지막 너의 뒷 모습만

  먼 훗날 저 세상에서 이 어미 보거든 내 품으로 달려오너라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내 아기 물 아래 옥돌 같은 내 아기 내 너의 옷 한 벌 해줄 터이니 소복단장하고 나풀나풀 나에게 오너라, 내 아기

 

  2

  어머님은 소복 한 벌 지어놓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4•3 때 행방불명된 오빠만 찾았습니다, 오빠만

 

 

 

♧ 찬란함의 무게 – 김양희

 

아침에 이웃집 정원에서 종낭꽃을 보았다

셀 수 없이 작은 은종들이 간드랑거리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스쳤다

저 꽃들 햇살 아래 반짝이면 빛날 텐데 하늘은 종일 흐렸다

 

저녁에 오래 알던 사람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봄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바람을 섞어 들이치는 빗줄기 에 창문 유리창이 시끄러웠다

불면은 어둠 속에 서 있고 나무는 밤새도록 꽃눈깨비를 날렸다

꽃 지기 좋은 밤은 없다

 

모든 만개한 꽃들의 지는 순간은 찬란하다

꽃잎이 흩날리거나 후드득 떨어지거나 차곡차곡 땅에 가 닿거나

지는 순간의 모습은 찬란하다

한 생을 온전히 꽃 피워 열중했으므로

 

비 개인 아침에

종낭꽃 나무 아래 하얗고 둥근 꽃 무덤을 보았다

지난 밤 빗소리에 숨어 가뭇없이 슬픔을 비워낸 자국이

물기에 젖은 채 반짝거린다

 

찬란함에도 무게가 있다면

물기 반짝이며 낙하하는 꽃잎의 허공이 가장 무겁다

햇살에 말려진 꽃잎들이 깃털을 모으고 있다

점점 가벼워지는 찬란함, 새가 되어 사라져간다

 

 

 

♧ 엘리베이터 – 김이향

 

가끔 깜빡깜빡 잊는 건

너와 나의 공통점

 

문 닫기 버튼을 눌렀는데

멀뚱멀뚱 잊었나 보다

 

그 사이에 나도 깜빡 잊고 온 핸드폰

핸드폰 가지고 오라고 기다려 준 거구나

 

이십 삼년

세월이 깜빡 그렇게 흘러갔구나

 

 

 

♧ 다소재 티 하우스 – 김항신

 

시향이 흐르는 유월의 첫 주

연서*에 날려 장필순**회

내 몸이 날 부를 때

 

최백호의 그쟈, 가 대답을 하고

조용한 다소재에

고소한 우영차 맛 가미한다 0

 

아드레날린 스미어 달큰한

붉은 향 흐르는

 

(그 맛이 궁금한 시간)

 

탁월한 선택이 흐르고

연서에 휘말려 귀천***에 들어본다

 

---

* '연서' : 김항신의 세 번째 시집.

** 장필순 : 가수, 노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 '귀천' : 신분이나 일 따위 귀함과 천함.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가을호(통권 제9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