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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3)

by 김창집1 2026. 2. 2.

 

♧ 마음 무덤

 

나는 싸리 울타리도 없어서

누군가 화살을 쏘면 심장에 바로 박히는 사람

 

마치 육탄전을 치른 듯한

겨울 연못, 물때 묻은 남루를 펼쳐 놓고도

멈춰 버린 고요가 어지럽다

 

꺾인 허리와 무릎으로 서 있거나

물속에 주저앉아 발목을 드러낸 줄기들

잿빛으로 삭아 가는 잎사귀들

그 틈에서도 빈 연밥

검은 씨앗 하나, 아직 뱉지 않았다

 

막대기로 휘저으면

흙탕물로 번질 어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내가 넘어진 건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었으나

곁에서 함께 다쳐야 했던

너를 탓한 날도 있었다

웃음 짓는 얼굴, 부르르

내 안을 흔들고 져 버린 날도 있었다

 

처음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며

마음 무덤이라 부른 뜻을 다시 묻는다

 

나를 연못 속에 잠시 내버려두고

그림자도 함께 묻는다

 

꺾여도 주저앉아도

두 발은 여전히 땅을 짚고 있으니

거친 밑그림처럼 멎은 나에게

색을 칠할 수 있을까

 

개구리 소리 푸르게 들려오는 즈음

나는 꿈을 꾸었다

 

연잎 위 물방울처럼 투명해진 내 그림자

화살처럼 솟아오른 연잎 대를 껴안고

바람 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파랑주의보

 

매화는 피지 않고

목련만 돌아오는 날

 

나만 아는 울음이

꽃샘바람 속에 내려앉는다

 

삶이라는 병은 쉽게 낫지 않아 숨이 날카로운 밤

때로는 울음만이

내 몸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자

다정하게 화해하는 길이 된다

 

대형마트 앞 사차선 턱에 몸을 웅크린 채

스스로 터져 나온 울음은

휘몰아치며 사라지지 않았다

 

구급차가 스쳐 지나도

울음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떠올랐다

바다의 표정을 먼저 살피고 포구로 걸어가는

바람을 가르는 걸음과

폭풍을 품고 삶을 일군 바다 같은 눈빛

 

내가 파랑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움은 먼 이야기였다

 

겨울 해남 산자락에서 다시

파랑주의보를 맞이한 일도

오래전 울음에 덮였던 밤이 떠오른 일도

모두 내가 파랑 앞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호흡을 고른다

파랑 후 아직 오지 않은 계절,

가장 은밀한 빛을

숨죽여 끌어안는다

 

 

 

♧ 귓속에 눈이 내리면

 

나의 위로는

섬 안에 없었다

 

어긋난 시간들을 달래며

웅크린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내어 주고

숨이 돌아올 틈을 마련해야 했다

 

엄살 섞인 말들이 부끄럽지 않게

겨울 산자락 아래까지 찾아온

내 뒤를 한 겹 파도가 따라왔을까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귓속에서 물결이 출령였다

바다를 마주한 밤이 지나도

여전히 스며 있는 소리

 

귓속에 불안까지 숨어들어

병원을 찾았지만

단 한 올의 머리카락이 고막에 박한 것뿐이었다

어이없는 웃음이 번졌다

 

섬을 떠나며

외발로 서 있던 날들을 외면할 수 없었으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뿐이었다

 

그때 귓속에 스며든 한 올 머리카락을 빼고

돌아오는 길

귓속이 텅 빈 바다처럼 고요하여

허전한 걸음 위로 눈이 내렸다

 

눈, 눈은

끝을 묻기 전에

이유를 세우기 전에

조용히 경계를 덮었다

 

 

 

♧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곁,

누구에게나 있다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 마음에 다녀가는 사람이 있어서

까치발로 걷는 저녁이 잦아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빌려 쓴 팽나무 가지 끝

달의 문장이 은은히 깊어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아오면서 숨겨야 할 것들

앞뒤가 없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돌려놓기 어려워서

우는 일은 더 어려워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뒤꿈치 구겨진 어둠

여전히 털어 내지 못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호젓한 그림자 위로 고양이가 지나가고

같이 걸어갈까 말하지 못한 그 어디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곁,

누구에게나 있다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