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연묵松煙墨 - 정미화
이 산 저 산 헤매며 좋은 소나무를
잡아다 아궁이 입에 먹인다
검은 보석을 얻기 위해
가마에 불을 지피고
밤새워 연기를 만든다
졸음과 땀으로 싸우는 인고의 시간
가마 속 아니 굴뚝 속에서
붓으로 조심조심 털어 그을음을 채집한다
한 수레를 태워 한 수저를 구하기까지
영혼도 함께 태워야 한다
소나무의 검은 혼은 아교를 만나면서
단단히 숙성되어 간다
긴 시간 바람의 손길로 섬김은 받아
먹 향은 진해져 마법의 먹으로 태어난다
장인의 노고가 빛을 보는 순간은
팔만대장경이나 직지심체요절과의 만남
춤추는 붓의 놀이에서 울림의 역사적 가치가 드러난다

♧ 상련傷蓮 - 정형무
꺾꽂힌 잿빛 연대궁
살얼음 서린 늪가를 어슬렁거린 탓이었을까
그날 밤 황음을 했지
귀잠 속을 박차고 일어나 어흐흥, 소리치며 발 굴렀더니
곁에 누웠던 여자
가슴을 파고들며 한참을 흐느꼈지

♧ 요양병원 – 채영조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심각한 물음에도
보람병원 늙은 의사는 통상적인 대답만 반복하여
전혀 신뢰성을 가질 수 없었다.
제1병원이라는 간판에 속아 옮긴
제2병동 말 짧게 하는 간호사는
연하곤란으로 식사를 하지 못하자
폐렴, 패혈증을 이야기하며
시시때때로 콧줄을 해야 한다며 말했다
‘밥을 코로 먹는다’고 말이 안 된다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강하게 부정하며
밥알을 도깨비방망이로 갈아
죽이나 미음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묵시적인 가족의 동의를 얻어
콧줄 하는 것을 허락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잔인한 폭염 속에서
시원한 물 한 잔 드실 수 없는 상태로
모진 세월을 참으면 버티었다.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도
누군가에게는
꼭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매일 밤 무릎 꿇고 엎드려
불효를 용서 구한다
결코,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 종심從心 - 한상호
꼿꼿이 살아온
뿌리 깊은 저 억새도
흰머리 끄덕
허리 굽히는 가을
마음 따라 살아도
거칠 게 없다는 건
흐르지 않는 바람을
고요히
마주 보아야 하는 일
늘

♧ 가벼운 여행 – 이령
엄마 하늘나라 가시고
홀로 나선 여행
바람이 퇴적의 구름 침상을 접었다 펴는 동안
비행기 푸른 날개 사이로
울컥 기억의 산란이 시작된다
활주로를 지나 창공에 들면
세파의 난기류를 벗어난 여행객들의 안도와 설렘이
추억의 지근을 들었다 놓는다
“나중에 꼭 비행기 태워 드릴게요”
지키지 못한 약속만 남겨 두고
지킬 수 있을 땐 이미 곁에 없는 당신
지나간 시간들이 창밖 빗방울로 죽죽 그려진다
커튼이 걷히자 저 아래 다닥다닥 늘어선 지붕들과
지붕 아래 더 작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집이 떠오르고
가족들의 도란소란이 지붕을 뚫고 구름을 뚫고
다시 비행 창에 어린다
“야~야! 이센1 그만 구름 위를 날고 싶데이~”
빗방울 현을 튕기며 자맥질하는 비행기는
무겁게 살아 내시느라 땅만 보다 가신 이의 마지막 음성을
년출년출 쉼 없이 뱉어 내고 있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떠날 수 있었다면
가시고도 거듭 오시는 이, 어머니일 수 없었을 테지
익숙했던 풍경마저 이리 와락 무너져 내릴 수는 없을 테지
구름 아래 살다 구름 꽃으로 구름 관에 드신 당신
이제 더는 무겁지 않으시지요?
고도에 들자 물기 찾은 창을 어루만지는 꽃구름
운무를 가르며 햇살 쪽으로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다
하늘 가락을 영접한 환한 얼굴로
“엄마, 우리 함께 가요”
가볍게 더 가볍게
*월간 『우리詩』 1월호(통권 제45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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