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
이것은 새와 나 사이의 거리
노트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둥글다'는 다가오는 말일까
벌어지는 말일까
접시 위에 노른자 무리가
군무를 펼치고 있다
식탁 위 양념 통과 그릇
말라 가는 과일이 숲을 이루고
난반사되는 지저귐 아래서
포크로 노른자를 찌르면
새는 깨진다
은유가 끝까지 다정했던 적이 있었는가
잠시 망설이면 타인이 된다
부리처럼 식은 밥을 쪼아 먹다
고독과 무리 사이
불안한 거리에서
은유가 시작된 건 아닌지 골몰한다
노트 속에 남은 새들의 발자국
인간들의 발자국이
서로 점점 가까워진다
무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

♧ 엄마는 나를 바다로 기억했다
아침부터 밀물이면
물옷을 입혀 달라 우는 검은 바위들
이마 주름 틈에 파도를 불어넣어 주며
발바닥을 만져 주었지
정오의 냄새는 이렇게 익숙해졌어
저녁이면 겨드랑이가 아프다며 칭얼대
지느러미가 돋아날 것 같다고
청동빛 달 아래 겨드랑이를 주무르며
엄마 얼굴 반쪽 떼어 내 얼굴에 붙였어
봄밤이 음각으로 남겨지는 동안
크레파스로 사라진 얼굴 반쪽에 내 얼굴을 그려 주었어
반씩 나눠 웃고 반씩 나눠 울었어
두 뺨 사이 낯설고 차가운 썰물을
엄마는 누구로 흉내 낼까

♧ 소꿉놀이
팔을 주웠다
내 인생과 달리 희고 굵고 힘찼다
몰입할 묵직한 감정은 없고
악몽을 주고 떠나는 당신을 때리고
어깨에 끼웠다
누구십니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몰라보았다
주운 팔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뺨을 때렸다
다른 팔이 뺨을 문질러도 허물어질 건 다 허물어졌다
고독도 꿈도 없으니, 무엇으로 바닥을 치며 살아야 하나?
목적이 없는 날의 연속
밤을 폭식한다
배꼽이 자정보다 불룩해지자
주운 팔이 벽에 못을 박아 나를 걸이 놓는다
기다릴 것도 없고 변할 것도 없고
기억하던 이름들마저 다 말라 버리고
나도 나인지 모를 때
주운 팔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목줄을 묶는다

♧ 엇갈리는 말
딸기에 가려면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설익은 말부터 챙겨야 해
아직 구름의 소리와
해의 발걸음이 되지 않은 말
비스듬히 바라보는 ‘설익다’
믿음은 '설익다'에서 시작되어
증오로 익어 버릴 수도 있어
증오는 끝까지 분명한 맛으로 혀에 남지
딸기의 단맛처럼
설익은 희망이 욕망으로 익을 때
딸기는 손을 뻗기 전에 으깨진다
욕망은 어디까지가 딸기인지 모르지
‘설익다’가 시간을 꿈꾸는 동안
섬뜩한 문장이 솟구치지 않도록 봄을 조이지 않아야 해
영원히 딸기에 도착 못 할 수도 있어
영원은 시작하는 연인처럼 오래도록 설익은 말

♧ 행복
자취방 골목 앞 노점상 어묵집
열 시쯤 문 닫을 시간이면
어묵 몇 개와 국물이 잔뜩 남아 있었다
천 원 주고 큰 냄비를 내밀면
남은 어묵과 국물을 내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었지
일주일 동안 국 걱정이 없었지
밤비처럼 흐르는 콩나물
두부처럼 떠오른 달
성게알처럼 흩어지는 별
모두 담긴 냄비가 무거워 배에 받치고 오면서
뜨끈하고 배부른 즐거움에 짝짝이 슬리퍼는 잊고
가로등 꺼진 날은 국물이 흐를까 봐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다니다 보니
눈이 커지고 예뻐졌다나 뭐라나
어묵 국물에 대파를 넣으면 대파국,
미역을 넣으면 미역국,
국만 먹어도 고향에 닿은 기분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 보나』 (걷는사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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