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날
그림자가 나를 떠났다
나도 떠났다
한줌의 재가 된 몸체
땅속으로 스미고 나니
땅이 빛을 발한다
내 그림자
하늘을 딛고 섰다

♧ 나 다시 필 거야
가뭄과 갈바람에 시달리던
언덕배기 새비낭* 한 그루
늦가을 어느 나
모질던 목숨 기어이 놓는다
꿈길인 듯 가는 길
숲이 낙엽 떨구며 통곡하는데
그림자 없는 놀빛 새비낭 영혼
무의식의 언어로 말한다
- 울지 마! 나 다시 필 거야
---
*새비낭 : ‘찔레나무’의 제주어.

♧ 굴메
ᄒᆞᆨ교 갈 때 ᄒᆞᆼ글ᄒᆞᆼ글 ᄄᆞ라와요
집이 갈 때 졸락졸락 ᄄᆞ라와요
나가 푸더지민 ᄀᆞᇀ이 푸더지곡
나가 ᄌᆞᆷ을 자민 ᄒᆞᆫ디 ᄌᆞᆷ을 자요
ᄐᆞᆯ락ᄐᆞᆯ락 엄마영 시장 가는 질
굴메도 엄마 손 꼬옥 심엉 가요
굴메는 날 잃어불어지카부덴
나 가는 딘 아무디나 ᄄᆞ라뎅겨요

♧ 우리 집 돌울담
시린 등으로 모진 풍파 견뎠네
긴 세월
멧비둘기 끅끅 앉았다 가고
까마귀 검은 노래 부르다 갔네
할아버지가 쌓았다니 어언 백 살
키는 점점 작아져 가고
세월이 굽은 등 어루만져 주는데
약속대로 봄이 또 찾아왔네
익숙한 몸짓으로
마당 가득 햇살을 가두어 놓네
담벼락에 기대어 졸고 있던 아기민들레
화들짝
초롱한 첫 눈을 뜨네

♧ 춘몽春夢
빨리 일어나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어머니
얼른 말하고 가신 후
저쪽 방에서
초봄이 벽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하루를
자근자근 뜯어먹는 일
나는 군소같이 언제나 더디다
해가 벌써 외길로 중천을 넘어선다
잡아당길수록 더 서쪽으로 간다
사방을 다 가진 하늘도
손이 없는 듯
어쩔 도리가 없다
햇살이 뭐라 했을까
마당 구석 개나리
하늬바람에 북북 찢겨진 상처에서
배곯은 입인가 꽃 하나 펼쳤다
그래 나도 너처럼 입 크게 벌려
서 하늘에 뜬 꿈이나 먹어야겠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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