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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겨울호의 시(3)

by 김창집1 2026. 2. 16.

 

♧ 2025년 11월 – 나기철

 

핸드폰 달력엔

다음 달이 비어 있다

 

손으로 미니

내년 1월

또 다음 달

다음 달

 

내년

또 내년

 

다 텅 비어 있다

 

 

 

♧ 밥상 위에 비스킷 – 오광석

 

달걀 두 개로 끝난 저녁 식사

네댓 시간 지나 물만 채운 배

밥상 위에 아침 식사용 비스킷이 굴러다닌다

 

시가 넘치는 세상인데

배고파 보지 않아 시를 쓰지 못했는데

사람은 굶으면 망상이 생긴다

 

바싹 튀겨진 채

소스에 버무려진 닭다리

하안 거품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들

입술에 대면 웃음 나오는 맥주 한잔

먹을 수만 있다면

영혼 한 귀퉁이 정도

마족에게 때어내 줄 수 있어

 

툭툭 튀어나온 잡념들이

비스킷 부스러기가 되어

밥상 앞에 널브러진다

허기진 머리를 채우려

하나둘 주워 먹는다

 

상상의 만찬이 끝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뱃속에 지독한 비명이 들리자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 진혼서시(鎭魂序詩) - 오승국

 

속절없이 울고 가는 가스름 바람이여

빈 들판 대나무 숲을 흔들지 마라

목숨 하나 허덕이는 처절한 모습일지라도

동녘 이슬 소박하게 맞아

하안 찔레꽃 무더기로 피워낸다

 

푸른옷 군인들의 핏발이 린 눈빛

잿더미로 남은 가스름 정든 마을

표선학교 운동장에서 도피자 가족으로

호명되면

아, 살 떨리는 두려움의 기억

그 총구 앞에서 팍팍 쓰러지던

버들못 붉은땅 피어린 한모살

달랭이모루 주젱이내창 이곳 저곳에서

 

죽어도 바닷가로 가지 않겠다며

산을 오르던 가스름 사람들

말 한 마디

손가락질 하나가 죽음으로 가는 죄

가친오름 너머 물찻 말찻 산란이 숲속에서

허기진 배 쥐어잡고

맹게낭 붉은 열매 따먹었다오

돌아오지 않을 새 봄을 꿈꾸며

육지형무소에서 온 엽서 한 장이

마지막 답변이었소

 

사멸(死滅)의 불바람이

휩쓸고 간 죽음의 시대

목숨 하나 간절했던 마르지 않는 눈물이여

사슴이의 마소가 눈앞에 떠오르고

따라비오름 고향 달빛 그리워지면

서천꽃길 마련하여 그대 마중하리니

작별하지 않을 약속을 위해

가시천 내장 미리내 다리 건너

따뜻한 고향 대지 이곳에서 편히 쉬세요

 

 

 

 ♧ 제주 하늬바람 – 진하

 

시양시양 늦가을바람 불어 온다

와상와상 나뭇가지들 운다

쑥대당 폭낭에 몰쿠실낭에

하늬바람 시앙시앙 와상와상

올레에 마당에 통시 모롱에

흙먼지 구듬은 덜싹덜싹

바람은 화르룽착 화르룽착

대문짝 흔들리고 문풍지 울고

촐눌에 콩눌에 주젱이 들썩여

정지 무뚱 장항 뒤 우영밭에도

어른들 모두 가을걷이 나간

적막한 동네 오후의 빈집 마당

혼자 뒤척이며 숙제하는 방문 앞까지

들썩이며 날리는 억새꽃 부스러기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 와상와상

문짝 흔들며 화르룽착 화르릉착

 

 

 

♧ 애물단지 – 현경희

 

끝도없이 내리꽃는다

창을 닫아버 리면

사라지는 신기루

시간 맞춰

창을 열면

쏟아지는 파란 물줄기

점점 좁아지는 틈새

막다른 절벽 끝에서

망설임없이 던진 영혼

 

지은 업보 거둬가듯

더 세차게

시원하게

내리꽂는다

 

빨간 용이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는

예언 속 그날

꼭 한번 볼 수 있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림없다

내가 산 종목

역시나 새파란 물기둥

 

 

                      *계간 『제주작가』 2025년 가을호(통권 제91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