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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4)

by 김창집1 2026. 2. 19.

 

♧ 쑥부쟁이

 

바다보다 먼저 늙은 해녀의 굽은 등에도

 

바다로 향한 발길은 묶인 채

물질하는 해녀들을 몰래 바라보는

뇌졸중 어머니 눈빛에도

 

파도가 숨죽인 틈에

꽃잎이 천천히 열릴 때가 있었다

 

삶이 저물도록

바다를 놓아주던 그 마음을

혹시 알아챘던 걸까

머리 위로 벌 한 마리 스쳐 갔다

 

몇 년 전,

훌훌 맨몸으로 꽃자리에 누우신 어머니

귀잠 들어

파도 향 머금은 꽃무늬가 남았을까

 

일주일째 이어진 불면의 밤

바다 그림자가 드리운 그곳에서

꽃무덤이 조용히 나를 부른다

 

 

 

♧ 나를 나이게 하는 곳

 

아버지 어깨 사이

바다의 뿌리가 있었네

숨결마다 짠내가 스며 있었네

 

어머니 발아래

오랜 이어도의 물결

그 너른 품에서 오누이 다섯

푸른 관절 첫 파도 되어 자라났네

 

한 겹 돌담 안, 바다를 모신 집

돌래떡과 메, 과일과 구운 생선

제물을 요왕신께 바치는 날이면

비념에도 비늘이 돋아났네

 

된장, 간장, 젓갈, 김치 항아리들처럼

사이좋게 어우러진 이웃의 시간이 쌓여 갈수록

깊은 정이 그윽하게 배어들었네

 

하루 낮, 나흘 밤만큼 짧고 깊은

바닷속에서 돌아온 해녀들

 

모닥불 곁 아이들 손에 미역귀를 쥐어 주고

검붉은 불티 흩날리던 날에는

바다 위 고깃배 불빛도 도깨비불 같았지

 

첫 발자국이 새겨진 그곳

바닷바람과 파도가 지문처럼 새긴 기억들

 

세월에 밀려가도

깊은 바닷속에 잠겨

여전히 그곳에서 숨 쉬는 듯해

 

파도들은 아직도

나를 깎고, 쌓고, 빚어 가네

끝없이, 이어지네

 

 

 

♧ 어제는 오늘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 속에 또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불러내는 일은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의식처럼

스스로 떠나기 위한 몸짓 같았다

 

뇌출혈 수술 후 잠시 돌아온 당신은

꿈을 현실처럼 붙잡고

현실을 허물어진 꿈처럼 놓았다

 

꿈속의 내게 누구냐고 묻는 당신과

현실의 당신에게 이름 잃은 내 앞에

 

밥상 위에 남은 당신의 숨결,

마루 위로 흩어진 햇살,

마당 밖으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

모든 날이 겹쳐

한꺼번에 펼쳐졌다

 

내려진 장막 틈새에

어렴풋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스물 중반,

봄빛처럼 서성이던 시절로

돌아가 버린 당신과

아직 그 자리에 닿지 못한

마흔다섯의 딸

 

그 사이의 시간은 꿰매어도

오늘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창 젊은 봄에 닿아 버린 당신을

바람처럼 놓아 드렸다

 

그 바람 속에 스며든 눈물은

언제나 봄보다 먼저 피었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