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 세상 밖의 위도 - 목경희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는 건
눈빛의 파동을 놓치는 일
가슴 밑바닥 끓어오르는 울분이
허공에서 무게를 잃고 흩어지는 일이다
손끝이 닿지 않는 거리는 나의 요새
타오르는 불길을 건너다보는
안전하고 차가운 관찰자의 위도다
분주한 소음은 파도로 부서지고
물리적 거리만큼 듬성해진 공간 사이로
설익은 소외가 서늘한 바람으로 분다
한발 물러선 풍경은 명징하여 투명한데
이름 불러 줄 이 없는 고요는
어느새 차오른 수면처럼 발목을 잠식하고
세상 밖, 이름 없는 위도에 표류하는 나는
묶이지 않아 가벼우나
닿지 못해 비대해진 고립의 무게
고요는 방패였다가, 이내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된다

♧ 지금 태평양에는 무슨 일이 – 박동남
태평양 섬 갯바위들이 빙 들러선 큰 웅덩이
밀물과 썰물이 들락이는 곳
웅덩이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지 못 한
랍스터, 새끼 상어, 문어, 바닷가재, 소라게,
각종 어종들이 갇힌다
열 시간이 지나야 물이 밀려올 텐데 얕은 물이 온도가 오르고 어종들은 물풀이나 바위틈 그늘을 찾는다
미국 마피아 문어는 여덟 개의 손에 무기를 장착 연타 공격으로 위협 웬만한 어류는 쪽도 못 쓰고 손이 물러 잡혀 먹히고 놀라서
위장과 분장으로 고심을 거듭
밀물이 들어와 운 좋게 입구를 찾은 놈은 빠져나가고 썰물이 되어도 통로를 찾지 못해 밍그적거리다 묶인 잔류는 또다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야쿠자 일본 바닷가재는 나름 기지를 발휘한다
가진 알을 몽땅 털어 내놓고도 알랑거린다 한국 아기 상어는 아기지만 배포가 있고 지혜와 지식이 있어 슬기로운 지능으로 협상 타결 마피아 문어는 자신도 모르게 오케바리를 연발한다 밀물이 들어올 때 순식간에 아기 상어는 웅덩이를 빠져나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가리지 않고 친구 먹는다
약한 소라게 유럽 마피아들은 소라 껍데기를 방패 삼아 머리를 맞대고 고심 중
중국 장궤 랍스터 커다란 집게는 특수 재질로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로 문어를 해체할 기세다
아무튼 인물은 성격이 납납하고 넙데데하니 반죽이 좋아야 한다

♧ 눈 위에 눈 – 박부민
오늘 내린 눈은
어제 내린 눈 위에서
보송보송 생존한다
내일 눈도
오늘 눈 위에서 그러하리라
모레 날이 개면
내일 눈이 맨 먼저 소멸하겠지
그때 어제 내린 눈은
오늘 내린 눈 아래서
더 오래 따스히 연명한다

♧ 때로는 아파야 한다 – 배한조
사람이 아픈 것은
죽음과 삶 사이
한 치 어긋난 차원을 건너는 일
가벼운 통증 속에서는
지금만 보인다.
견딜 수 있는 아픔을
아프다 부르며
사람을 탓하고
세상을 탓한다.
그러나
되게 아픈 사람은
고통의 가장 안쪽에서
시간을 거꾸로 건너간다.
그릇되었던 선택,
미루어 둔 사과,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못했던 날들
하나씩 꺼내
회계하듯 들여다보며
다시 아파한다.
사람은
가끔 아파야 한다.
한 번쯤은
되게 아파야 한다.
된 아픔을 지나고 나면
곧게 서지 못해도
부러지지 않는 법을 안다.
등 굽은 소나무처럼
휘어 살아가는 법을

♧ 가을의 중첩 – 오설
비장한 인수봉의 가슴에
절절한 단풍 들어
내 가슴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고 말았네
뭣도 모른 채
계곡으로 성급히 뛰어든 단풍잎들이
급물살에 그만,
정신 줄을 놓아버리듯
어느 노인의
고장 난 신호등도
덩달아
연일 가파르게 널뛰고 말았네
파란색이었다가
빨간색이었다가
주황색으로 연신 끔뻑거리다
이내
가물가물 덮여버리고 마는
마른 눈꺼풀
가을의 중첩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45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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