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산책'의 시(4)

by 김창집1 2026. 2. 27.

 

♧ 가을 한 채

 

삼 개월 무이자로 들여놓은 가을 한 채

커튼을 젖히자 스며드는 햇빛 사이로

감물 든 염색 스카프 흘린 것도 같고요

 

달이 그믐 쪽으로 한 귀퉁이 깨물 때마다

불안을 물어뜯던 어릴 적 버릇은 남아

몇 남은 나뭇잎조차 뜯어 먹곤 하지요

 

새들도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 시간

방금 뜯은 불안은 책갈피에 넣어 둘래요

마음 쪽 부서지는 날 다시 꺼내 보려고요

 

 

 

♧ 달의 외출

 

밤하늘 바라보다

주머니를 뒤적여요

 

날마다 비워 내도

다시 또 차오르는

 

어머니 생각나는 밤

달을 자주 읽어요

 

찌르르 풀벌레 소리

가까워진 어깨 너머

 

모서리 아물 때쯤

외출에서 돌아와요

 

하얗게 눈동자 하나

완성되는 여름이에요

 

 

 

♧ 안녕, 엄마

 

  구름을 지우는 일은 여름과 나의 계획

 

  소나기를 만났어요 땅만 보고 뛰어가다 정신없이 뛰어가다 돌부리에 걸렸지요 우산을 그만 놓치고 흠뻑 젖은 날들에게 심장을 그어 대는 첼로의 현을 따라 소나기가 깔깔대요 숨고만 싶어져요 엄마의 자궁 속은 오래전 나의 다락방 참았던 힘을 다해 끝까지 달려가요 턱밑까지 차오른 이 기분은 여름이에요 핏덩이로 태어나 딸이 되고 여자 되고 아내 되고 어머니 되는 딸들의 연대기를 나는 아직 쓸 수 없어요 구름의 노래를 너무 자주 불렀나 봐요 이 저녁 누가 자꾸 눈물을 훔쳐 가요

 

  여자로 태어났지만, 그런 말은 지워요

 

 

 

♧ 귀를 열다

 

향일암 고운 스님

저녁 종을 칩니다

 

납작한 바위 위에

나를 꺼내 놓으면

 

먼 데서 오시는 어머니

종소리를 닮았습니다

 

동전만한 소원 하나

그마저도 부끄러워

 

어둡고 습한 모서리

길들지 않은 문장이어도

 

온전히 펴질 때까지

먼 곳이 되기로 합니다

 

 

 

♧ 육추育雛

 

오름식당 처마에 제비들 세 들어 산다

흙에다 지푸라기 윗목 같은 보금자리

 

살 비벼 사는 모습이

단칸방 옛집이다

 

눈곱도 떼지 못한 새벽이 눈에 밟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치열한 사랑으로

 

묵묵히 지켜 내는 것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란 이름으로 어머니가 되기 위해

깨물면 다 아팠을 열 손가락 생의 지문

 

어떻게 건너셨는지

가신 길이 아득해

 

보름 녘 내 창가에 퉁퉁 분 젖을 물리던

목련이 떠난 자리 푸른 잎 저리 씩씩한데

 

아직도 넘어질 때마다

엄마, 엄마 찾는다

 

 

                  *김진숙 시조집 『잠깐이라는 산책』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