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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6. 3. 1.

 

♧ 나무와 말 – 성숙옥

 

빈 겨울나무를 본다

마른 잎이 쌓인 나무의 밑동이 단단하고

머무는 새들의 날갯짓에 가지에 고인 말이 휘청인다

누군가의 말은 마음에 온기를 넣어

맺힌 생각을 풀기도 하지만

틀어진 말은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한다

시간으로도 길들이지 못한 마음은 저 혼자

쓸쓸해져 몸을 나와 가지를 흔든다

저 나무엔 다시 잎이 나지만

기울어진 마음엔 어둠만이 무겁게 차올라

다시 싹 틔우지 못하리라

휘어진 가지의 말에 내 마음도 쳐진다

그래 푸르게 반짝이던 수많은 말도

잠깐이면 저 바닥 될 것을

 

 

 

♧ 묵화 – 이상욱

 

먹은

한지 위에 스미어

장미를 피운다

 

한 송이 두 송이 포개질수록

눅진한 시간이

계단처럼 짙어진다

 

곡선은 허공을 따라 흔들리고

벼려진 꽃잎은

아직 터지지 못한 말들

 

붉음보다 깊다

검은 향기가 뼈를 긁는다

 

옷섶에 번진 얼룩,

가슴 한쪽 아래

밤처럼 스민다

 

 

 

♧ 나비들의 군무 – 이수미

 

오나라 오나라 아니 오나,

 

경복궁 수정 전 앞 국악 공연을 보는데

단체로 놀러 온 듯한 여학생 열댓 명이

즉석에서 우르르 뛰쳐 나와

 

무용을 해서 이쁜 건지

이쁜데 무용을 한 건지 눈이 부시다

 

손끝 발끝을 사뿐사뿐 오므렸다 펼쳤다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휘감았다가

날아갈 듯이 풀어내는 몸짓이

 

연못 위에 한 무리의 나비 떼와 어우러져

연꽃이 살랑살랑 피어나는 것 같아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걸

오늘에야 새삼 알았다

 

 

 

♧ 바닥 이데아 – 이중동

 

바닥이 바닥에 펑퍼짐하게 앉는다

술병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였는데

 

신문지를 깔기도 전에

박혀 있는 활자와 떨어져 나간 문장들

 

구인과 구직의 종종걸음

아득히 쌓여 가는 모델 하우스,

줄을 타고 떠난 사람 위로 눕는다

 

빛나던 것들이

빈 병 속으로 숨어든다

 

해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 앉는다

 

신문지는 펼칠수록 찢고 싶을수록

경전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가장 처참한 것은 두고 일어선다

 

사방은 알록달록하고

바닥이 바닥을 기억하는 색이다

 

어디에도 붙지 못한 먼지들이

새벽 쪽으로 천천히 떠간다

 

 

 

♧ 훈련소에서 걸려온 전화 – 이상연

 

일주일 만에

반가운 번호가 집안 공기를 흔든다

 

강원도 화천의 겨울이

편도선을 따라 세차게 불고

밤새 고열로 후송차에 갔더란다

 

육 주의 훈련기간 동안 면회는 없고

주말 저녁 허락된 한 시간의 통화

 

전화는 끊겼는데

 

조금만 덜 춥기를

감기가 빨리 낫기를

잠을 푹 자기를

밥맛이 좋기를

화장실을 잘 보기를

얼굴에 로션을 꼼꼼히 발라 트지 않기를

교관들에게 많이 혼나지 않기를

훈련하다 다치지 않기를

같은 동기들과 친해지기를

퇴소식까지 잘 버티기를

 

나의 하루가

끊긴 전화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45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