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승달 - 안시표
구름에 비척거리는 파리한 몸짓
하늘을 움켜쥔 높쌘구름 아래
물안개 허물을 벗는 조례동 호숫가
수면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부레옥잠처럼
하늘을 오르다 끝내 오르지 못하고
휘어지는 버드나무 가지가
쪼르륵, 쪼르륵,
호숫가 단숨을 마신다
그 소리에 놀란 물고기들
밤잠 설쳐 대다 지느러미 꿈길로 젖어 들면
지상, 어둠으로 내려간 공기 방울 비비며
뻐끔! 뻐끔!
부레옥잠 잎자루를 뜯는다
마음은 피터 팬, 하는 짓은 후크선장

♧ 협죽도 – 양대영
열대야 속으로
섬의 혼을 불러 모았다
얇은 옷가지를 걸쳐 입은
대담한 줄기가 한밤중에 깨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가부좌를 틀 듯 움직임 없는
뜨거운 명상만으로도 꽃을 피우다니
그러나 살아온 것들은 이제 사라지고
풍문만 무성하게 남았어도
허공을 파고 들어갈 빛깔의 힘
성난 눈들이 햇빛을 받으려 한다
암술만 빼내어
한평생 독하게 같이 살고 싶다

♧ 닳은 나의 검정 고무신은 오지 않았다 – 양동림
세차게 내리는 비가 창문을 똑똑 두드려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니
빗방울은 튀어오르며 불빛을 받아
연꽃 문양 장콜래비를 만들고 있었다
머나먼 나의 기억들은 장콜래비를 타고
아득히 멀리 떠 내려간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만든 대나무잎배들이
좁은 수로를 타고 내려간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수로를 따라 무수한 배들이 떠간다
중산간마을이 순간 해상왕국이 된다
댓잎배는 가다가 쓰러져도 다시 띄우면 된다
수로 옆집 담벼락엔 무수히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기억 한 방울
기억 두 방울
비가 온 다음날
아버지의 커다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어기적거리는 소년이 학교로 간다
수로를 따라 힘차게 내려가던 고무신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목적지에 오지않은 다음 날이다
친구들의 신발은 속속 목적지로 도착하였는데
유독 나의 신발은 생활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나 보다
마을 길이 넓어지며 대나무도 안 보이고
추억들을 흘려보내던 수로도 사라졌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나의 고무신은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으리라
비가 오는 날이면 나의 기억 속으로 와
다 흘러가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리라

♧ 백수 선언 – 이철수
이제 나 돌아가련다
일이 공격 되지 않는 자유로운 내 안의 세계로
게으름을 선택할 수 있는 노을 물든 과수원으로
발효의 시간에 길든 익숙한 공간
김장독 항아리는 텅 비어가지만
내 안의 자유 억지로 잡아두는 건
나를 무참히 썩게 하는
발효의 인내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래 그동안 폭삭 속았다
앞으로의 행로가 어떨지 몰라도
내가 찾아가는 그곳에 희망은 반짝이리
미안하다 남아서 일을 지켜야 할 그대들이여
아프지 말고 행복해라 진심으로 응원한다
세월에 낡아가는 기억을 무심히 바라보다
팔딱이는 추억이 선명하게 입술에 와 닿으면
막걸리 곁들인 옛일 마실 날 있으리
가난하지만 화려한 백수의 길
나 이제 가련다

♧ 상그릴라에서 – 임애월
산소가 힘이 빠진 대기의 파동은 숨가쁘다
해발고도 3,300미터
수천 년 묵은 시간들이 물속처럼 고여있는 곳
세상에서 제일 큰 마니차를 돌리며
그 속에 숨겨둔 경전의 행간을 짚어 읽으면
버리지 못한 욕망의 질량만큼 부풀어 오르는
불기소로 처분된 우리의 죄들, 상승기류를 탄다
검은 눈을 가진 야크들의 나라
평생이 수고로운 그들의 잔등에 매달린 삶의 무게
그 치켜든 뿔들
향기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내밀한 죄명들이 스스로 튀어나오는
이곳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천천히 흐른다
티베트 가정집에서 수유차를 얻어 마시고 저녁을 먹었다
그들의 빵을 나눠먹고 치즈도 먹었지만
접대를 위해 샤브샤브 냄비에 올려진
야크의 고기는 차마 먹지 못하고 일어섰다
어둠이 끌어온 상그릴라 밤거리엔 아직도
키 큰 마니차가 금빛 원을 그리며
설산을 향해 커다란 지문을 찍고
모서리 하나 없는 둥근 달은
오래된 고성을 품어안고 '잃어버린 지평선'*으로
지상의 낙원을 궁글리고 있다
---
*상그릴라를 배경으로 썼다는 제임스 힐튼의 소설 「Lost Horizon」.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 2025년 제1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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