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무는 인생이 어찌 꽃이 아니랴 – 이화인
가을은 더 찬란한 봄이다
봄에만 꽃이 핀다고 말하지 마라
꽃에 나비가 날고 새가 노래한다고
곱게 물든 단풍이 어찌 꽃이 아니라!
지는 낙엽이 낙화가 아니라!
소슬바람에 휩쓸려 구석진 응달 낙엽에
듬성듬성 내려앉는 눈송이가 나비가 아니라!
노을 자락에 지는 해가 눈물겨웠다고
저무는 인생이 어찌 꽃이 아니라!
인생길에 바람 불고 눈비 치는 날 없으랴!
고비마다 고난과 역경이 꽃으로 피기까지
나를 지탱해 준 너의 사랑과 용서
황혼 길이 거친들 아름답지 않으라!
저무는 인생이 어찌 꽃이 아니랴.

♧ 이 겨울 지나고 나면 – 임승진
봄부터 가을까지
어여쁜 뜰 밝혀주던 꽃
한 송이가 웃으면 그 옆자리
서로 닮은 미소로 피어나고
그렇게 화사하던 길목
傲霜孤節(오상고절), 菊花(국화)만 남았네
하루가 부족할 만큼 행복했지
햇살 반짝이던 아침부터
샛별 떠오르는 저녁까지
生命(생명)의 노래 들려주었건만
서리 고개 너무 아려서
시린 걸음 땅 위에 눕는구나
이 겨울 지나면 다시 올 테니
모닥불 피워놓고 기다릴 거야
먼 길 해치고 새봄 이르면
더욱 장성해서 돌아오겠지
그 모습 반가워 눈물 가득
살아있는 오늘을 감사할 거야!

♧ 출세出世 - 정순영
끼니 거르지 않고
등 누일 잠자리 있고
자랑거리 펄럭이는
세월 있으면
부자고
출세한 거지
가출해서 얘깃거리 남긴
소크라테스
석가가 별거더냐
시간 안에서 살다가
시간 밖으로 떠나는
세상 고난苦難거리 자랑이나 한 거지

♧ 밤에 그린 사모곡 – 황현중
먼 길을 돌아와 부은 발목에서
구멍 난 양말을 벗겨내는 것처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빈방처럼
생각이 없다
생각이 없어도 좋은 그 생각마저 삭제될 듯
적막한 밤,
먹물 속에 온몸이 잠긴다
내 몸은 한 자루 붓
몸이 가는 대로 흐릿한 오솔길을 내고
겹겹이 산봉우리가 내려앉은
수묵 한 폭이 눈썹 밑에 내걸린다
담뱃불이 호롱불로 켜지고
불꽃이 날리며 여백에 뭇별들을 찍는다
산기슭에 토담집 한 채 호젓하다
어머니의 손이 수틀 위를 정갈히 오가고
감나무에 업혀 보채는 반달,
감나무가 바닥에 누운 제 그림자에
하나둘씩 낙엽을 떨어뜨린다
넉넉하게 뿌린 닭 모이를 쪼는 것처럼
뭇별과 뭇별들이 소색이는 소리에
초가지붕 위에 박꽃 하야니 벌고
그래, 나는
어머니의 손으로 수놓은 먹먹한 자수다
어머니는 아직도
어느 가을 하늘 모서리에서
내 눈물을 찍어 별을 수놓고 있을까
채 완성하지 못한 수묵화가 강물에 젖는다
달빛 물고기 지느러미가
수초로 엮은 사립문을 드나들고
문창살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뒷모습
아랫목에 묻힌 따뜻한 밥그릇을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얼굴인 양 쓰다듬는다
갑자기 수면 위를 차고 오르는 날갯짓에
화들짝 다시 돌아온 여기,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하늘에서
삼십 촉 흐린 달빛이 졸고 있다
마지막 붓끝을 세워
느티나무 가지 사이에 해먹을 그려 넣는다
깰까 말까 망설이며 흔들리는 꿈,
머리맡에서 어머니는 자장가를 부르고
나는 어머니의 가난과 슬픔을 읽는다

♧ 소진 – 정지원
빛바래져 가는
가뭇한 해무 위
그대 사랑 채워요
거뭇한 몽돌, 뻘 위 칠면초
산속으로 질주하는 게
닻 내린 포구의 배
검은 거미줄 같아
해송 그늘 아래
붉은 털중나리
길 옆, 하얗게 웃으며
간들거리는 큰까치수영
초저녁 밤하늘
달무리에 싸인 초승달
빙긋이 웃는다
배터리 나간 카메라에
담긴 희미한 피사체들이여
*월간 『우리詩』 2026년 2월호(통권 제45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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