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수풀문학' 2025 제20호의 시(3)

by 김창집1 2026. 3. 12.

 

♧ 골목 – 이정은

 

제주 한림, 서쪽 끝의 골목은 시간을 굽히며 나를 들였다.

낮은 돌담들이 한 뼘씩 숨을 고르고, 풀꽃들은 그 틈마다 자라고 있었다.

나는 파란 접이 의자 하나를 골목 끝자락에 펼쳤다.

돌담은 등을 대도 좋다고 속삭였다.

머리 위로 뭉게구름이 장난처럼 흘러가고,

하늘은 낮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을까.

이 골목에 마음을 묶고 간 사람은?"

풀벌레 소리가 느릿하게 골목에 가라앉았고

돌담에 드리운 그림자가 붉은 석양빛으로 번졌다.

마음속 그림자들도 함께 길어졌다.

하늘엔 별 하나, 초승달 하나가 나란히 떠 있었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낡은 엽서처럼 오래된 기억을 펼쳐 보였다.

그 밤, 나는 골목을 나서지 않았다.

나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풀꽃이 말을 걸고, 하늘이 대답하는

이 조용한 환유의 공간 속에서

나는 그저,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난 뒤에도 이 골목이 오늘처럼 숨 쉬고,

파란 의자 하나 조용히 펼쳐져 있기를.

 

 

 

♧ 징검등 – 김양희

 

한 무리 산양이 절벽을 건너뜁니다

 

늙은 등 징검다리 어린 굽이 지르밟고

 

도약을 받친 낙하가 가문을 지켜냅니다

 

건너간 초원에선 무성히 풀 뜯는 소리

 

다음 벼랑 만나도 차례 없는 차례로

 

공중은 부양 구름판 등덜미 떠받칩니다

 

 

 

♧ 오우아吾友我 - 고성기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처럼 살자

혼자 있어도 맛이 들면

내 벗은 내가 되느니

정류헌

종일 비 오면

내 안의 나를 불러낸다

 

맺지 못할 사람이라면

묶지 말고 흐르게 하라

대문 활짝 열어도

찾는 이 없으면

 

외롭다

말을 바꾸면

황홀한 참자유

 

 

 

♧ 생의 한가운데 – 김미옥

 

생선 한 마리 응급실에 실려왔다

시퍼렇게 뜬 눈을 감길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의사 가운을 입고

손이 피범벅이 된 채 생을 가르고 있었다

 

다시 내장을 제자리에 넣고

원래대로 돌려내라고 의료사고라고…

 

냄비 안에서 절절 끊고 있는 절규가

들썩거렸다

 

되돌릴 수 없는 생선 가운데 한 토막

 

싱싱하고 토실한 기억에 소금을 뿌려

짠 내 나는 언니의 젖은 옷을 말리기로 했다.

 

 

 

♧ 오늘 별 하나 – 김승현

 

수 많은 별들을 징검다리 삼아

눈으로 걸어봅니다

그러다

붓을 들어

빛의 물감을 묻히고

어둔 밤하늘에 한 점 찍어봅니다

오늘 그린 별도

참 예쁘게 빛납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여전히 빛나는 별들과

새롭게 빛나는 오늘의 그대를 이어

별자리 하나 그려봅니다

 

한 점 한 점 별을 밟아 봅니다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 문학』 2025년 제20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