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골목 – 이정은
제주 한림, 서쪽 끝의 골목은 시간을 굽히며 나를 들였다.
낮은 돌담들이 한 뼘씩 숨을 고르고, 풀꽃들은 그 틈마다 자라고 있었다.
나는 파란 접이 의자 하나를 골목 끝자락에 펼쳤다.
돌담은 등을 대도 좋다고 속삭였다.
머리 위로 뭉게구름이 장난처럼 흘러가고,
하늘은 낮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을까.
이 골목에 마음을 묶고 간 사람은?"
풀벌레 소리가 느릿하게 골목에 가라앉았고
돌담에 드리운 그림자가 붉은 석양빛으로 번졌다.
마음속 그림자들도 함께 길어졌다.
하늘엔 별 하나, 초승달 하나가 나란히 떠 있었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낡은 엽서처럼 오래된 기억을 펼쳐 보였다.
그 밤, 나는 골목을 나서지 않았다.
나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풀꽃이 말을 걸고, 하늘이 대답하는
이 조용한 환유의 공간 속에서
나는 그저,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난 뒤에도 이 골목이 오늘처럼 숨 쉬고,
파란 의자 하나 조용히 펼쳐져 있기를.

♧ 징검등 – 김양희
한 무리 산양이 절벽을 건너뜁니다
늙은 등 징검다리 어린 굽이 지르밟고
도약을 받친 낙하가 가문을 지켜냅니다
건너간 초원에선 무성히 풀 뜯는 소리
다음 벼랑 만나도 차례 없는 차례로
공중은 부양 구름판 등덜미 떠받칩니다

♧ 오우아吾友我 - 고성기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처럼 살자
혼자 있어도 맛이 들면
내 벗은 내가 되느니
정류헌
종일 비 오면
내 안의 나를 불러낸다
맺지 못할 사람이라면
묶지 말고 흐르게 하라
대문 활짝 열어도
찾는 이 없으면
섬
외롭다
말을 바꾸면
황홀한 참자유

♧ 생의 한가운데 – 김미옥
생선 한 마리 응급실에 실려왔다
시퍼렇게 뜬 눈을 감길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의사 가운을 입고
손이 피범벅이 된 채 생을 가르고 있었다
다시 내장을 제자리에 넣고
원래대로 돌려내라고 의료사고라고…
냄비 안에서 절절 끊고 있는 절규가
들썩거렸다
되돌릴 수 없는 생선 가운데 한 토막
싱싱하고 토실한 기억에 소금을 뿌려
짠 내 나는 언니의 젖은 옷을 말리기로 했다.

♧ 오늘 별 하나 – 김승현
수 많은 별들을 징검다리 삼아
눈으로 걸어봅니다
그러다
붓을 들어
빛의 물감을 묻히고
어둔 밤하늘에 한 점 찍어봅니다
오늘 그린 별도
참 예쁘게 빛납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여전히 빛나는 별들과
새롭게 빛나는 오늘의 그대를 이어
별자리 하나 그려봅니다
한 점 한 점 별을 밟아 봅니다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 문학』 2025년 제2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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