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의 말
팔순 고개를 넘어선다.
숨 가쁘게 달려 온 세월
이마에 그려진 주름에서
누런 내음이 번지는 황혼이
나도 모르게 흐르고 있구나.
수평선 너머로 흐르는
내 머리털 같은 은빛 세월,
과거라는 이름 속에 묻혀버리고
아쉽고 그리움만 남은,
눈 들어 앞을 보니
너무나 좁은 여백으로 보이지만,
무엇으로 채우나!
내게 마지막 남은 여백에.
〈여백〉 중에서

♧ 입춘 산행
파란 뱀의 해
입춘의 바람이 살짝 불어와
겨울의 흔적을 털어내는 아침,
고내오름을 오른다.
차가운 흙을 밟으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나뭇가지 사이
조용히 날 바라보는 눈
갈색의 노루 한 마리
순간 멈춘 시간 속에서
우리 눈이 마주친다.
아직 겨울빛 남은 산등성이,
그러나 노루의 숨결 속엔
새로운 계절이 피어나고 있다.
그는 한순간 주저하더니
능선 너머로 가볍게 사라진다.
나는 다시 걸음을 떼며
노루가 남긴 봄의 기척을
가슴속 깊이 안고 간다.

♧ 비 개인 아침 오름에서
밤새 광풍 몰아치고
굵은 빗줄기 쏟아 내리더니
새벽이 오면서
누구의 조화인가
스르르 고요해졌네.
선잠 눈 비비며 오른
고내봉 전망대에 서니
한라산 주위 열 지어 선 오름들
흐르는 운무 속에서
농익은 수묵담채화 쉼 없이 그려내는
퍼포먼스의 향연
5월이 무르익어가는
보광사 오솔길
짙은 녹음 내음이 싱그럽고
벗께들 노랫소리
오케스트라로 울려 퍼지는
가슴 속엔
상큼한 새 공기로 씻어내고
맑은 햇살,
새로운 정기로 가득 채워서
솔숲 우둠지 향해
두 손 활짝 펴 만세를 부른다.

♧ 애월 들녘에서
이번 마을 훤히 보이는
남녘 동산에 서니,
푸른 바다를 향한 항구
양팔 벌리듯, 크게 뻗어나간 방파제
밀려오는 파도 잠재우고
목포행 화물선 뱃고동 소리
메아리로 들리는,
애월 들녘은
사철 짙은 녹색 들판
취나물이 일렁인다.
밭마다 이랑과 고랑 사이에
길게 한 줄로 앉아
김매는 아낙들 모습
한 폭 풍경화.
녹고메 곶자왈에서 흘러내리는
밝은 물 먹고
넉넉한 일조량을 받으며
숭숭 뚫린 밭담 구멍으로 스미는
달빛에 젖은 해풍을 마시고 싱싱히 자라,
도시의 밥상 위에 당당히 올라설 날
조용히 기다리는 명품
애월 취나물.

♧ 애월 한담에서
과오름 맥줄 바다에 뻗어
아담히도 병풍 단애 만들어져
조그만 동굴들 그늘 드리우고
너럭바위 둥근 먹돌 더미 아래
하얀 모래톱 바다 멀리 깔아놓아
작은 해송 숲 동산 올레길 지켜서고
수선화 찔레꽃 쑥부쟁이도 만발하고
억새도 춤추었네.
밀려오는 물결 끝자락
용천수는 풍족히 솟아올라
여남은 초가지붕 오손도손 정겨웠지
바닷새 졸고 있는 코지 바다,
ᄌᆞᆷ녀들 물질에 망사리는 풍성하고
테우 위 서방님은 자리돔 그물질 바쁜데
얕은 물 속엔 벌거숭이 인어들이
조개를 줍고 있었네.
세월 속에 추억은 숨어버리고
한 폭 풍경화이던 동네
얼룩덜룩 낯선 추상화
콘크리트 괴물로 변해버려
한 세대 만에 고향 찾은 나그네
석양 노을만 망연히 바라보고 섰네.
*김충림 시집 『포구(浦口)』 (다층,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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